[시론] 북한도 리비아를 따르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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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9일 리비아의 국가원수인 카다피는 그들의 대량살상무기(WMD) 프로그램을 전면 포기한다고 선언했다. 이것은 냉전 종식 후 국제적 제재를 통해 대량살상무기 문제가 자연스럽게 해결된 대표적 사례로 꼽히게 됐다. 이제까지 핵문제를 비롯한 대량살상무기 문제는 결코 제재방법으로 해결되기 어렵다는 설이 지배적이었다.

그 동안 국제적 제재로 인해 핵 개발을 포함한 대량살상무기 프로그램을 포기했다는 국가를 찾아보지 못했다. 냉전시기 동서 양 진영의 체제 대결로 인해 국제적 제재가 효력을 발휘하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대량살상무기 개발을 추구했던 국가들은 동서 양 진영의 교묘한 체제 간 역학관계를 활용해 국제적 제재를 극복하려 했다. 리비아나 북한도 예외는 아니다.

그러나 탈냉전이 완전히 자리잡게 됨으로써 대량살상무기 프로그램으로 인해 제재 국면에 처한 국가들은 더 이상 냉전시대의 체제 간 역학관계를 이용할 수 없게 됐다. 그 중에서도 '세계경찰'로 군림하고 있는 미국이 지목한 제재 대상 국가들은 더욱 더 어려운 처지에 빠지게 되었다. 미국은 이라크를 군사적으로 공격한 것과 같이 경제적 제재 수단뿐 아니라 군사적 제재 수단을 적극적으로 구사하고 있다.

카다피는 이러한 환경적 변화에 매우 재빠르게 적응하는 '영리'함을 보였다. 지난 23일 라디오 토크쇼 인터뷰에서 콜린 파월 미 국무장관이 "이제 북한도 영리해져야(get smart) 할 때"라고 말했다. 과연 김정일 위원장도 카다피와 같이 '영리'해 질 수 있을 것인가?

지난해 10월 북한 핵문제가 다시 불거진 이후 북한은 사실상 국제적으로 '제재 아닌 제재' 상황에 빠져 있다. 물론 유엔을 통한 제재 결정은 아직까지 없다. 향후에도 당분간 유엔의 대북 제재와 같은 강경조치가 있을 것 같지는 않다. 중국과 러시아가 반기를 들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국도 북한 핵 개발에 대해 적극적인 거부태세로 나오고 있는 상황에서 북한이 핵 개발을 고집할 경우 중국으로부터의 각종 지원 거부 또는 중단사태가 초래될 수 있다.

일본으로부터의 경제적 지원 가능성은 더욱 더 희박해질 전망이다. 현재 북한이 기댈 수 있는 유일한 경제적 젖줄은 남한이라 할 수 있다. 북한이 핵문제 해결을 위한 전향적 조치나 과감한 결단이 없는 한 우리의 대북 경제적 지원 노력에도 한계가 노정될 수밖에 없다. 대북 인도적 지원을 지속해 오던 유럽연합(EU) 국가 및 국제구호 단체들 역시 북한의 핵문제로 인하여 대북지원에 대해 점점 미온적으로 나오고 있다.

북한은 내부적으로도 다급한 상황이다. 북한은 새로운 경제조치('7.11 경제관리개선조치')를 내놓고 부분적 경제개혁 체제에 돌입하고 있으나 오히려 경제적 혼란은 더욱 가중되고 있는 실정이다. 경제난으로 인한 분배시스템의 와해로 김정일 정권에 대한 충성심도 예전 같지 않다. 특히 배고픈 군대생활로 인해 군대의 일탈현상도 심화하고 있다. 군대에 지원하겠다는 충성 분위기는 사라지고 군대를 기피하는 풍조가 확산되고 있다.

'선군정치'로 충성구조를 인위적으로 유지해 보겠다는 김정일 정권의 노력도 경제난 해결의 성패에 달려 있다. 이렇게 볼 때, 어떻게 해서든 김정일 정권은 미국을, 그리고 세계를 만족시켜 줄 수 있는 핵문제에 대한 해법을 제시해야만 한다. 북한에는 시간이 없다. 시간을 끌면 끌수록 김정일 정권의 안정성이 담보되기 어렵다. 김정일 정권이 결국 카다피의 '영리함'을 따르지 않을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러나 김정일 정권은 핵포기 선언 이전에 당분간 '몸값'을 부풀리기 위한 '벼랑끝 전술'을 최대한 구사하는 '영민함'도 지녔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정영태 통일연구원 선임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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