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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시론

문화대통령을 기다리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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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대통령 선거가 6개월 앞으로 다가오면서 대선 주자들이 여러 공약을 내세우며 유권자들의 마음을 사로잡고자 한다. 일자리를 만들어 실업자를 줄이겠다거나, 세금을 감면해 국민의 생활수준을 향상시키겠다고 한다. 남북 간 교류를 강화해 한반도에 평화를 정착시키고 통일의 기반을 구축하겠다는 사람도 있다. 기업 하기 좋은 나라를 만들고 노사 관계를 안정시키겠다는 주자도 있다. 모두가 정치.경제.사회와 관련된 공약들이다. 우리 사회의 당면 문제가 무엇인지, 우리 국민의 가장 큰 관심사가 무엇인지가 공약에 잘 드러난다.

그럼에도 이들에게 우리 운명과 미래를 맡기기에는 어딘가 미흡한 마음을 떨쳐 버릴 수 없다. 그 미흡감은 그들의 약속에서 미래의 비전을 발견할 수 없다는 데서 비롯되는 것 같다. 물론 미래의 비전은 국민소득 4만 달러 시대를 열겠다는 '경제적 약속'이나, 가까운 시일 안에 남북통일을 이룩하겠다는 '정치적 약속', 기업 하기 좋은 환경을 만들겠다는 '사회적 약속', 특히 입시 문제를 해결해 공교육을 정상화하겠다는 '교육적 약속' 등에서도 찾을 수 있다.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러한 약속을 어떻게 실천해 나가겠다는 구체적 방법론의 제시다. 미래의 비전은 돈과 권력과 명예를 획득하는 것보다는 각자의 다양한 행복의 욕구를 충족시킴으로써 삶의 질을 높이는 데 있기 때문이다. 바로 여기에서 문화의 중요성이 대두된다.

흔히들 21세기는 문화의 시대라고 말한다. 실제로 영화 한 편이 자동차 수출 전체보다 높은 수익률을 올릴 수 있고, 한 편의 드라마가 수천만 명을 감동시킬 수 있으며, 한 권의 소설이 수백만 명의 독자에게 삶의 의미를 깨닫게 할 수 있다. 예술을 통해 높은 교양, 깊은 지식, 세련된 생활을 누릴 수 있는 것이 문화라고 한다면 21세기는 문화 산업을 통한 부가가치 창출이 경제성장의 동력이 되는 시대다. 단순히 예술 향유라는 내면적 풍요를 통한 삶의 질 향상만이 아니라 예술 창조와 문화 산업이 경제성장에 적극 기여하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 전 세계는 인터넷에 의해 모든 정보가 실시간으로 제공되는 개방 사회로 전환되면서 기존의 물리적 국경이 무의미해지고 있다.

이처럼 패러다임 전체가 달라진 세계에서 문화 정책에 대한 새로운 비전을 내세우지 못하는 후보들은 과거의 아날로그적 세계에 머물고 있는 것은 아닌가. 정보화 사회에서 이런 지도자는 시대의 흐름에 뒤처질 수밖에 없다. 그래서 우리에게 필요한 대통령은 '문화 대통령'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 문화에 대한 이해가 높고, 예술에 대한 탁월한 정책을 세우고 실천할 후보자를 대통령으로 뽑아야 한다.

문화 정책에 대해 아무런 계획도 없는 지도자는 21세기 대통령이 될 수 없다. 21세기 대통령은 무엇보다 기초 예술에 대한 이해와 지원 방안이 뚜렷해야 한다. 우리나라의 자연과학이 세계적인 수준에 이르렀으면서도 노벨상 수상자를 내지 못하고 있는 것은 기초과학 교육이 부실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기초 예술이 제대로 육성되지 않으면 우리 문화는 후진국 수준에 머물고 삶의 질 향상도 요원해진다. 우리나라를 문화 선진국으로 끌어올릴 문화 대통령이 필요한 시점이다.

그래서 나는 대선 후보들이 문화예술 정책을 놓고 TV 토론을 개최할 것을 제안한다. 문예진흥원을 문화예술위원회라는 민간 기구로 바꿔 놓고 예산을 오히려 매년 10%씩 줄이는 문화정책은 문화의 세기에 역행하는 것이다. 이 퇴행을 역전시켜 생동하는 문화 미래를 꽃피우기 위해 대선 후보들이 적극적으로 나서주길 기대한다. 우리나라를 선진국으로 만들 수 있는 중요한 길이 지도자의 문화예술에 대한 자질과 비전에 있다. 이제 우리 유권자들이 그것을 검증해야 한다.

김치수 문학평론가·이화여대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