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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러 실질협력 관계 진입/옐친 방한 무엇을 남겼나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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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경협 아쉬운 러시아 과거 청산 적극적/대북관계 재검토… 동북아 새질서 구축
옐친러시아대통령의 이번 방한은 동북아지역에서 한국에 대한 동반자로서의 전폭적인 신뢰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옐친대통령은 19일 노태우대통령과의 정상회담에서 한국측의 희망사항에 대해 당초의 기대이상으로 적극적이고 정치적인 타결의지를 보여줬다.
먼저 양국간에 오랜 앙금으로 남아 관계발전을 해나가는데 불신의 요인이 돼온 과거사와 관련해 시원한 조치를 행동으로 보였다.
옐친대통령은 지난 83년 구소련 공군전투기에 의해 격추된 대한항공 007기의 블랙박스를 넘겨주고,사건종결을 위한 다자간 전문가위원회 구성을 제의했으며,구소련을 승계한 러시아의 국가원수로서 유족과 한국민에 사과했다.
블랙박스는 구소련은 물론 고르바초프대통령조차 존재를 부인해온 것으로 러시아도 당초에는 이 기록을 제3의 국제기구인 국제민간항공기구(ICAO)에 넘기려던 것을 과감하게 피해당사국인 한국에 전달한 것이다.
또 한국전의 고통을 이해한다고 밝히고,이와 관련한 자료를 발굴하고있으며 연말까지는 1단계 작업을 마무리해 한국측에 인도하겠다고 밝혔다. 옐친대통령은 『자료가 모두 발굴되면 누가 도발했는지 밝혀질 것』이라며 스탈린시대의 논리를 거부한다고 말해 소련의 논리를 거부한다고 말해 소련의 개입을 숨기지 않을 것임을 시사했다.
이는 한국측이 러시아에 대한 경협차관을 재개하는 등 경제개혁에 대한 지원의지를 보인데 대한 호응이기도 하지만 아­태지역에서 중요한 동반자로 인정하는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또 한국측이 지속적인 관심을 표시해온 스탈린치하의 강제이주 한인문제와 관련해 법적 지위와 명예회복은 물론 물질적인 보상을 위한 법적 조치까지 취하고 있다고 말했다.
현재 러시아측이 제기하고 있는 과거문제의 하나로 서울 정동 구러시아공관부지 문제도 『모스크바에 한국대사관 부지를 제공하는 것을 연계해 검토하겠다』고 한국측의 요구를 상당히 수용할 뜻을 비췄다.
이러한 과거문제의 완전한 정리 및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라는 공동의 이념을 토대로 양국은 「기본관계조약」을 체결,장기적으로 정치적인 협력관계로까지 발전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했다.
러시아의 급속한 대한 접근은 결과적으로 북한에 대한 기존의 관계에 상당한 영향을 미치는 것이 불가피할 것 같다.
먼저 러시아는 한반도의 비핵화와 남북상호사찰을 지지했고,북한에 대한 핵물질 및 기술지원을 중단하겠다고 약속했다. 또 북한에 대한 무기공급을 중단했으며,그 예로 미그29기 조립공장 건설약속을 파기한 사실을 들었다.
러시아와 북한을 한국과 미국 사이의 상호방위조약보다 훨씬 강도높은 동맹관계로 묶어 주던 「우호협력 및 상호원조조약」의 핵심조항인 제1조에 대해 재검토하고 있다고 밝혀 대북한정책이 전면 재정되고 있음을 시사했다.
더구나 옐친대통령은 한국에 대해서는 러시아의 군사장비와 군사과학기술을 제공하겠다고 밝혀 러시아측의 향후 동북아 정책방향을 분명히 했다.
옐친대통령은 특히 경제분야에서 한국의 경협차관 재개에 감사하고,한국기업의 러시아 진출을 요청하고,야쿠트가스전 개발 및 연해주공단설치,과학기술분야의 협력확대 등 한국측의 관심분야를 적극지원하겠다고 약속했다.
옐친대통령은 더 나아가 21세기에도 양국이 협력할 프로젝트로 자원·원유·과학기술·전자·라디오·관광·제약·사회간접시설·시멘트·산림개발·냉장고·조선 등 23개 프로젝트를 제시했다.
옐친 방한에서 특별히 주목해야할 부분은 러시아의 대아­태정책을 밝힌 국회연설이다. 옐친대통령의 취임후 아시아 국가로는 처음으로 한국을 방문한 점을 고려,「서울 독트린」이라고 할만큼 포괄적이고 구체적인 아­태정책을 발표했다. 아­태지역의 안보문제를 다룰 다자간 안보협의체제를 제의하고 이에 앞서 소지역인 동북아지역에서 먼저 다자협의체를 만들 것을 제의했다. 또 항해 자유확보를 위한 국제해군,아­태분쟁방지센터,지역전략 연구센터 등의 설치도 제안했다.
옐친대통령은 아­태 경제협력(APEC)각료회의 가입 등 동북아경제권 편입의욕을 보이고 주둔군 감축,중·단거리 미사일 제거,태평양함대 감축,함정 및 잠수함 탑재 전술핵무기 제거 등 러시아 극동군사력의 감축에 관한 구체적인 계획도 밝혔다.
옐친의 방한 언행들은 그야말로 냉전시대의 구도를 벗고 경제중심의 국제관계를 설정하려는 의욕을 보인 방문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이러한 러시아의 적극적인 대한제스처에 비하면 한국측은 오히려 상당히 조심스런 상태다. 과거사에 대한 요구외에는 요구가 분명하지 않다. 특히 군사협력문제에 있어서는 미국의 눈치를 상당히 살피고 있고,무기구매 문제는 미국으로부터 연구용이상은 곤란하다는 입장을 전달받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한국정부는 이 부분이 은밀하게 추진되기를 희망한다는 인상을 주고 있다.
그러나 클린턴행정부의 등장과 함께 다자간 안보협의체문제가 긍정적으로 검토되기 시작하는 등 미국의 대아시아정책은 변화기를 맞을 것으로 보여 옐친대통령의 이같은 제의가 어떤 결과로 나타날지는 아직 속단하기 어렵다.
옐친대통령은 이를 감안한듯 부시행정부와 합의한 전략무기 60% 감축을 클린턴행정부와 조약으로 체결하겠다고 밝히고,조약체결 이전에도 일방적으로 중형폭격기 생산중단,SS­18 ICM해체,내년 7월까지 핵실험 동결 및 중국의 참여촉구,3년내 잠수함 생산중단 등 세계차원의 군축문제에 관한 입장도 표명했다. 또 옐친대통령의 적극적인 대한공세는 특히 일본을 불편하게 만들 가능성이 있다.
이제 한반도를 둘러싼 새로운 질서구축이 시작되고 있으며,주변강국들 사이에선 한국도 장기적인 전망속에서 새 외교의 좌표를 정해야 할 때가 됐다는 느낌이다.
옐친대통령은 이번 방한기간중 경협차관의 이자지불 불능으로 야기된 한국경제인들의 불안감을 일소할만큼 러시아 경제개혁을 위한 의지가 강력함을 보여줬다고 평가된다. 따라서 경제분야에서의 협력관계도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될 것으로 보인다.<김진국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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