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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관337일…"지옥이었죠"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7면

『시문(5) 엄마, 고생했어….』
정말 꿈결 속에서나 들어본 것처럼 한동안 잊고 지냈던 남편(유명우)의 다정한 목소리를 듣고도 전화기를 받아든 나(이태화·28) 는 아무 말을 할 수가 없었다.
현해탄 너머의 자랑스런 남편을 위해 무언가 위로의 말을 하긴 해야 할텐데 마음만 앞섰지 자꾸만 눈물이 번져 나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빠가 이겼다고 좋아라 소리치며 2층과 아래층을 쿵당거려 오가는 시문이는 정녕 승리의 값어치를 아는 것일까.
악몽처럼 잊을 수 없었던 지난해 12월17일, 뜻밖의 패배 뒤에 찾아온 적막강산과도 같던 당시 분위기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축하 전화의 쇄도 속에 나는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지난 82년, 프로에 데뷔해 36연승(14KO)을 구가하며 WBA주니어플라이급 17차 방어의 위업을 쌓았지만 남편의 첫 패배는 마치 영원한 패배인양 온 가족을 짓눌렀다.
애써 즐거운 시간을 가지려 남편의 친구 조양근(빙그레)씨가 뛰는 프로야구장이나 친구모임 등에 부부동반으로 적극적으로 나서보았지만 챔피언 시절에 느껴보지 못한 알 수 없는 어색한 중압감은 정녕 견뎌내기 어려운 1년의 쓰라린 세월을 강요했다.
남편은 새 출발을 하려는 듯 평소 하고싶어 하던 영어회화 공부를 위해 일주일에 2번씩 종로에 있는 학원을 찾긴 했지만 가끔 무엇인가에 홀린 듯 그저 멍하니 창 밖을 내다보거나 밤새 잠 한숨 못 자며 뒤척이곤 하던 뒷모습을 보며 역시 복싱을 못 잊는구나 하는 생각에 가슴이 미어지는 아픔을 느꼈다.
그러던 7월초하루, 남편은 마침내 재기를 선언했다.
꼭 반년을 줄넘기 한번 안하고 골똘한 생각만을 거듭하던 남편은 타이틀 탈환이 문제가 아니라 자신의 프로복싱 인생에 첫 패배란 오점을 남겨준 이오카에게 설욕하기 전엔 정말이지 글러브를 벗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일단 결심이 선 이상 부모님의 만류를 뿌리치고 중2의 어린 나이에 입관료 3천원을 모아 대원 체육관을 두드렸던 황소고집의 남편을 꺾을 수는 없었다.
사실 남편은 지난해 말 이오카와의 18차 방어전을 마지막으로 은퇴하겠다고 나와 굳게 약속했었다.
주위에선 IBF동급 챔피언인 마이크 카바할(미국·24)과의 1백만달러 통합타이틀전, 20차 방어의 금자탑 등 보랏빛 추파로 남편을 유혹했었지만 체급경기 특유의 체중감량은 혀를 바짝바짝 타들어가게 하는 고통의 연속이었기 때문이다. 식성이 좋은 남편은 가리는 음식이 없었건만 1m65cm의 신장으로 한계 체중 48·980kg에 맞춰야하는 까다로운 조건은 언제나 집안에서 음식냄새를 앗아갔다.
이번에도 여느 경기 때와 마찬가지로 한달 보름여 동안 시아버님(유한식·66)을 비롯, 온 식구가 2층에서 마치 도둑밥을 먹기라도 하듯 몰래 밥을 지어먹는 해프닝을 벌여야 했다.
수험생을 둔 온가족이 수험생이 듯 우려식구도 모두 타이틀전에 임하는 선수일 수밖에 없었다.
이때부터 아침 6시에 기상, 관악산 12km의 로드웍과 하루평균 4∼5시간의 실전 훈련, 밤마다 계속되는 이오카의 경기 비디오 분석이 하루도 빠짐없이 계속됐다.
주위에선 1년동안 단 한차례의 실전 경기도 치르지 않았고 텃세가 심하다는 일본에서의 원정경기라는 점등을 이유로 남편의 재기에 비관론을 펴는 사람이 많았지만 변해버린 남편의 얼굴에서 나는 승리를 읽을 수 있었다. 그토록 원하던 설욕을 하고서도 내년 4월 둘째아이를 낳게될 나의 걱정은 또다시 새롭게 시작된다.
10년 동안 그토록 좋아하는 김치찌개를 단 한번도 마음놓고 먹어보지 못한 남편의 수도승 같은 생활이 이번엔 과연 얼마나 또 계속돼야 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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