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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맺힌 세월 달래려 조국 찾아왔죠"-66년 북한서「소련파」남편 잃은 한인2세 윤 엘리나 할머니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3면

『조국이 없는 재소동포들은 항상 마음 한구석이 텅 비어 있습니다. 특히 조국인 북한에서 남편과 부모를 빼앗긴 재소유가족들의 가슴은 한으로 썩어가고 있습니다.』북한의 조선노동당 고위간부를 지내던 남편과 함께 오지 탄광에 유배돼 막노동을 하다 남편을 잃고 구 소련으로 탈출해 모스크바에서 살다 한 교회의 초청으로 생애처음 지난8일 서울에 온 윤엘리나씨(75)는 텅빈 가슴에 조국을 심어 가기 위해 서울에 왔다』며 파란만장했던 자신의 인생보따리를 털어놓았다.
윤씨가 조국땅 평양에 첫발을 디딘 것은 해방 이듬해인 1946년 가을. 자신처럼 한인2세인 남편 허익(당시 35세·카자흐 교원대 교수)이 소련정부로부터『북한에 들어가 김일성을 도우라』는 명령을 받아 가족과 함께 꿈에 그리던 해방조국을 찾았다. 남편 허씨는 도착다음날 소련군정으로부터『김일성 대학을 사회주의 명문대학으로 육성하라』는 명령을 받고 이 대학 어문학부 강좌장을 맡아 사회주의 조국의 장래를 짊어지고 나아갈 후진 양성에 젊음을 쏟았다.
이 공으로 허씨는 1년 후 이 대학 사범대학장으로 승진됐고 평양 인민 경제대학 설립에 참여, 이 대학 초대학장을 맡았다. 이어 허씨는 54년부터 조선노동당 중앙당학교장(장관급)으로 옮겨 59년까지 노동당 간부양성에 온힘을 쏟았다. 56년부터 58년까지 북한지역에는 숙청선풍이 몰아쳐 허씨와 함께 평양에 들어간 소련파 인사들이 대거 숙청돼 현지에서 총살당하거나 소련으로 망명했다. 허씨에게도 예외는 아니었다.
59년 8월 허씨는 중앙당 학교장에서 해임되고 청진 광산대학 부학장으로 발령이 났다.
충격적인 강등인사였지만 숙청된 동료들의 운명에 자위하며 당의 명령에 순응했다. 그러나 청진에 내려간 다음날부터 허씨에 대한 사상검토가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부인과 두 아들의 소련국적을 포기시키지 않고 혼자만 조선국적을 취득했으며 소련신문을 12년 동안 구독한 것, 소련파 인사들과 깊은 교분을 맺은 것 등을 이유로 6개월 후 당은 허씨를 부학장에서 해임시키고 출당 명령과 함께 함남의 수동탄광으로 정배했다.
청천벽력이었지만 허씨는 끝까지 가족에게 가장의 위약함을 드러내지 않으려는 듯『죽이지 않고 탄광으로 보내는 것도 다행』이라며『혼자탄광으로 가「좋은 세상」을 기다릴 테니 세 아들(평양 제6고등중학교 재학중)을 데리고 모스크바로 돌아가 뒷바라지를 하라』고 부인에게 권유했다.
윤씨는 그렇지 않아도 몸이 약한 남편 혼자 탄광으로 보내는 것은 사행길로 보내는 것이었기에 세 아들만 모스크바 친척집으로 보내고 남편의 정배길을 따라 나섰다.
수동탄광촌은 말 그대로 첩첩산중이었다. 탄광의 당 위원회에 신고를 마친 부부는 당 위원회 주선으로 한 광부집에 방 한칸을 얻어 유배생활에 들어갔다.
아침7시부터 오후7시까지 12시간 동안 허씨는 지하2km막장까지 들어가 탄을 캤고, 윤씨 역시 협동농장과 목욕탕 등 건축공장에서 벽돌을 나르는 막노동을 했다. 알고 보니 탄광지배인과 당 위원장이 허씨의 대학·당 중앙학교 제자들이었지만 처음부터 전혀 모른체 했다.
매일 1인당 식량 8백g씩(쌀30%·강냉이70%) 배급될 뿐 기타 부식은 모두 자급자족해야 했다.
이 식량으로는 도저히 세끼를 연명할 수 없었다. 윤씨는 점심 한끼를 거르며 남편의 도시락에 보탰으나 허씨의 건강은 영양실조로 점점 악화되어 갔다.
윤씨는 궁리 끝에 텃밭 언저리에 닭을 키워 매일 낳는 달걀로 남편의 몸조리를 하기도 했다.
지옥 같은 탄광생활 7년.
허씨는 가슴에 맺힌 한과 체력에 벅찬 중노동으로 지병인 심장병이 점점 악화되어 갔다. 윤씨는『그이가 그토록 기다리는「좋은 세상」이 올 때까지 나는 꼭 그이를 살려야한다』는 일념으로 지도원에게 매달려 평양 여행허가를 받아냈다. 평양주재 소련대사관에 호소해 심장병 약을 얻기 위해서였다.
66년 4월25일 밤 야간열차를 타고 대사관에 도착, 소련인 의무관에게 남편의 딱한 처지를 호소해 1개월분의 심장약을 구해 26일 오후 수동 탄광역에 도착했다. 여느 때나 다름없이 역 출구에 지도원이 미리 나와 윤씨를 기다리고 있었다. 윤씨는 통상적인「그림자 업무」수행 때문일 것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지도원은 집을 향해 발걸음을 재촉하는 윤씨 앞을 가로막고『반동분자 남편이 어젯밤 죄과를 이기지 못해 자살했소. 오늘 중 매장할 계획이니 그렇게 아시오』라고 통보했다.
순간 윤씨는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듯했다.
『그이는 나를 속이고 혼자 자살할 사람이 아니다. 자살을 위장한 타살일 것』이라고 판단한 윤씨는 지도원을 뿌리치고 집으로 달려갔다.
남편은 방 한가운데에 입에 거품을 물고 누워 있었고 옆에는 이웃 주민들이 갖다준 민간요법 심장약병이 놓여 있었다. 이웃 주민이 윤씨에게 눈짓으로 밖의 굴뚝을 가리켰다.
굴뚝 안을 들여다보니 흰 걸레 뭉치로 막아놓았다. 윤씨는 순간 고의적인 연탄가스 사고로 판단, 남편의 시신을 해부해 사인을 규명해달라고 지도원에게 항의했다. 앞뒤 가리지 않는 윤씨의 발악에 못이겨 함남도 당에서 의사가 나와 해부, 허씨의 사인은 연탄가스 중독으로 밝혀졌다. 그러나 누가 헝겊으로 굴뚝을 막았는지는 끝내 밝혀내지 못한 채 윤씨는 주민들의 도움을 얻어 탄광기슭에 남편을 매장하고 날마다 아침저녁으로 묘에 찾아가「무정한 남편」의 묘를 붙들고 외로움을 달래며『소련국적이 있으니 모스크바로 보내달라』는 내용의 편지를 소련 대사관에 보냈다. 6개월 후인 56년 12월말 대사관으로부터 출국통지를 받고 평양으로 올라가 북한 당국의 검열을 받고 7년여동안 피를 말렸던 지옥을 탈출, 아이들이 있는 모스크바에 도착해 제3의 인생에 들어갔다.
『세 아들이 모두 대학을 졸업, 기사장 등 번듯한 직장을 갖고 남부럽지 않은 생활을 하고 있지만 마음은 항상 오지 탄광촌의 산골짜기에 묻고 온 남편의 묘에 가 있습니다. 통일이 되어 성묘할 수 있는 날이 어서 오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윤씨는 잠시동안 창밖을 향해 시선을 정지시켰고 주름진 그의 얼굴에는 빗물 같은 눈물이 흘러내렸다. <김국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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