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이홍구칼럼

6·25를 잊지 말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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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인구 2억 명이 넘는 세계 최대의 이슬람국가 인도네시아보다 바로 옆 나라인 인구 450만 명의 도시국가 싱가포르의 국방예산이 더 많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더욱이 국민소득 3만 달러를 넘어 이미 선진국 대열에 합류한 싱가포르가 국가예산의 32%를 국방에 충당하고 있다는 사실은 놀랍기만 하다. 6월 초 매년 싱가포르와 영국전략문제연구소(IISS)가 함께 주최하는 '아시아안보회의'에 참석하여 미래의 아시아 안보에 대해 활발한 토론을 하던 중에도 싱가포르 정부의 국가안보에 대한 확고한 자세에 부러움을 억제할 수 없었다. 잘산다는 것은 잘 지킨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는 평범한 이치가 국가운영 차원에서 구체화되고 있는 현장에 앉아 있었기 때문이었으리라. 6월이 오면 6.25를 상기할 수밖에 없는 우리로서는 국가안보에 대한 우리의 준비태세가 과연 얼마나 충실한지 확신할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싱가포르든 한국이든 확고한 안보정책의 추진은 적어도 세 가지 요소를 갖추어야 한다. 첫째, 나라의 독립과 사회의 기본가치를 지키는 데 최우선순위를 부여하겠다는 안보의식을 지도자와 국민이 함께 갖고 있어야 한다. 둘째, 국가안보를 위해서는 국민 각자의 희생을 포함한 응분의 대가를 치르겠다는 각오가 있어야 한다. 셋째, 강대국이 아닌 상대적 약소국일수록 자력에만 의존하기보다 국제적 동맹과 연대를 통하여 안보를 달성하려는 지혜가 있어야 한다. 집무실에서 만난 고촉통(吳作棟) 전 총리나 공식 만찬연설을 한 리셴룽(李顯龍) 총리도 이러한 안보정책의 전제조건, 특히 안보 차원에서 공동이익을 지닌 우방 간의 네트워크 형성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한국과 싱가포르의 입지나 안보환경에는 상당한 거리가 있지만 아시아의 평화를 위한 지역안보 체제를 만들어가는 데는 긴밀한 협력의 여지가 크다는 데 동의하였다.

시장경제로 묶인 아시아의 안보상황 미래에 대해 우리나 싱가포르 지도자들이나 대체로 낙관하면서도 세 가지 위험요소를 예방하는 데 진력해야겠다는 의견은 같이하고 있었다. 첫째, 미국과 중국 간의 충돌은 반드시 막아야 한다. 중국은 군사적으로 미국과 대등할 수 없다는 것을 시인하고 있으므로 금융통화 및 통상 면에서의 갈등이 앞으로 더 커질 것에 대해 걱정된다는 것이 싱가포르의 관점이었다. 둘째, 이라크를 비롯한 중동사태의 악화가 전면적 파국에 이른다면 그에 따른 심각한 안보위기로부터 아시아도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 셋째, 지구온난화를 비롯한 기후변화의 폐해는 안보적 위기를 몰고 올 수 있다. 아직도 빠른 경제성장에 집착할 수밖에 없는 아시아 지역은 이에 따른 온실가스 배출의 증가와 기후변화 위기에 대처하는 자제와 규제라는 상반된 목표가 수반하는 딜레마에 봉착하게 된다.

이러한 아시아의 관점과는 다소 차원을 달리하여 미국의 게이츠 국방장관이나 독일의 융 국방장관은 실패한 국가, 핵무기 확산, 국제 테러리즘의 세 가지 위험요소가 결합되는 위기의 예방을 국제사회의 최대 안보과제로 강조하였다. 게이츠 장관은 자신과 라이스 국무장관이 냉전 시기에 소련 연구로 박사학위를 취득하였음을 상기시키면서 "냉전은 한 번으로 충분하다"고 단언하며 강대국 간의 충돌보다 실패한 국가에서 비롯되는 위협에 훨씬 더 큰 비중을 두었다. 동북아안보의 핵심인 북한 핵문제에 대하여는 역시 계속적인 우려를 표명하고 있지만 궁극적으로 6자회담이 해결의 실마리를 마련할 것이라는 희망을 갖고 있었다. 김장수 국방부 장관도 6자회담은 북한 핵문제뿐 아니라 동북아의 안보과제에 대한 해결책을 모색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할 수 있다고 강조하였다.

이렇듯 6자회담에 대한 기대를 유지하면서도 핵 선군주의를 앞세운 북한의 모험이 계속되는 한반도의 안보 위기를 어떻게 관리할 것인가라는 일차적 책임은 바로 우리의 몫임은 더 말할 필요도 없다. 북한 핵문제가 초래한 남북한 간의 군사적 불균형이 수반하는 안보 위기에 적절히 대처하는 지도자의 용기, 자유를 지키기 위해 희생을 감수하겠다는 국민적 의지, 그리고 대한민국의 안보와 한반도의 평화를 위한 동맹관계와 국제적 유대를 발전시켜 나가는 지혜가 그 어느 때보다 필요한 시점이다. 6.25의 교훈을 망각한다면 희망찬 미래를 내다보기가 결코 쉽지 않을 것이다.

이홍구 중앙일보 고문 전 국무총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