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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어 에세이 ⑭] 팔라 메사 골프장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14호 16면

미국의 한 골프학교(PGCC)에서 연수하고 있는 필자는 지난해 9월 어느 날, 미국인 클래스메이트 3명과 함께 라운드에 나섰다. PGCC에 입학한 이후 첫 라운드이기도 했다. 함께 라운드에 나선 클래스메이트는 모두 20대 초ㆍ중반의 나이에 건장한 체격을 한 청년들. 학기 초라 서로 이름도 잘 몰라 서먹서먹한 사이였다.

때리는 공마다 숲으로 울타리로…

이 가운데 대니 라이트라고 자신의 이름을 소개한 친구는 유독 낯을 가리는 편이었다. 대니는 미국 유타주 출신의 꽃미남. 나이는 25세라고 했다. 이 친구, 1번 홀부터 티샷이 들쭉날쭉하더니 더블보기와 보기를 연거푸 했다. 샷거리는 엄청난데 페어웨이에 떨어지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오호라, 장타자도 별거 아니구나.’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티샷 거리가 그리 길지 않은 필자는 장타자 사이에서 용케도 파 세이브와 보기를 번갈아 하면서 힘겹게 생존하고 있었다.

그런데 화가 잔뜩 난 듯 식식거리던 대니가 8번 홀(파4)에서 마침내 제대로 한 건을 터뜨렸다. ‘따악∼!’ 둔탁한 파열음과 함께 하얀 공 하나가 큰 포물선을 그리고 날아가더니 갑자기 시야에서 사라졌다. 터벅터벅 걸어나가 보니 페어웨이에선 공을 찾을 수 없었다. 혹시나 싶어서 고개를 돌렸더니 그린 언저리에 하얀 공이 사뿐히 안착해 있는 것 아닌가. 무려 340야드를 넘게 날아온 셈이다. 물론 공 주인은 대니였다. 한동안 할 말을 잃었다. ‘이놈, 정말 괴물이구먼.’

그 이후 망가진 것은 필자였다. 힘겹게 보기로 넘어가던 필자는 대니의 장타쇼를 본 뒤엔 기가 질렸다. 가뜩이나 샷거리가 달리는 판에 괴력의 장타자와 함께 라운드하려니 힘이 부치는 것을 실감했다. 더구나 주제넘게도 ‘백 티(back tee)’에서 티샷을 하다 보니 어깨에 힘이 들어간 것은 불문가지. 드라이브샷은 물론 가까운 거리에서도 ‘쪼로’를 내기 일쑤였다.

어라, 보기 좋게 티샷한 공이 페어웨이 주변의 가정집 울타리 너머로 사라지는가 싶더니 이번엔 무성한 나무 숲 사이에 공이 빠졌다. 팔라 메사의 러프는 또 좀 깊고 질긴가. 수풀이 무성해 공을 도저히 찾을 수 없었다. 이때부터의 상황은 필설로 다 표현할 수가 없다. 아마 저만치 떨어져서도 필자의 머리에서 김이 모락모락 나는 모습을 지켜볼 수 있었을 것이다.

11번 홀을 지나면서 상황은 더욱 나빠졌다. 세컨드 샷을 보기 좋게 숲 속으로 날려버린 필자는 골프백을 뒤져 공을 찾았다. 그런데 아뿔싸…. 공이 없었다. 이리 뒤지고, 저리 뒤져도 하얀 공은 종적을 감춘 지 오래였다. 이날 필자가 가지고 나간 공은 6개. 그런데 진주알 같은 이 공들을 모두 잃어버리고 만 거다. 초면에 대니에게 공을 빌려달라고 할 수도 없고…. 미적미적하면서 플레이를 늦추던 참에 갑자기 공 하나가 손에 잡혔다.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공을 꺼내 페어웨이에 내려놓는 순간, 필자는 기절하는 줄 알았다. 그 공은 겨울철에나 쓰던 오렌지색 볼이었다.

‘까짓것 할 수 없지, 뭐. 기왕 이렇게 된 거 이판사판이다.’ 필자는 이후 스코어에 신경 쓰기보다는 남은 홀을 오렌지 공 하나로 버티기 위해 안간힘을 써야 했다. 대니란 놈은 갑자기 나타난 오렌지 공을 보고 황당해하는 표정이다.

“대니, 코리아에선 말이다. 겨울철 눈밭에서도 라운드를 한다. 지금 내가 쓰고 있는 이런 오렌지 공으로 말이다. 이게 바로 한국 골프가 강한 이유다. 알겠냐.”
대니는 씩 웃더니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곤 라운드 내내 이 한마디로 필자를 놀렸다.

“저기 네가 때린 호박(pumpkin)이 굴러간다.” (미국 명절인 ‘핼러윈 데이’에 쓰는 오렌지색 호박을 빗댄 말이다.)

팔라 메사 골프클럽은 페블비치나 PGA웨스트처럼 최고급 골프코스는 아니다. 그렇다고 시설이 형편없는 싸구려 골프장은 더더욱 아니다. 미국 내 200대 골프장 안에 들기도 했으니 말이다. 적당한 페어웨이의 굴곡과 아기자기한 풍광이 한국의 골프장을 연상시킨다. 홀마다 코스 양편에 큰 나무가 빽빽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에 그런지도 모르겠다. 특히 참나무ㆍ느릅나무와 플라타너스가 무성한 11번 홀(파5)을 지날 때면 공원을 거니는 듯한 기분이 든다.

팔라 메사 골프코스에서 좋은 스코어를 내려면 겸손해야 한다. 인내심도 필수다. 조금 잘나간다 하여 우쭐댈 일이 아니다. 조금 힘들다 해도 참고, 또 참으면 반드시 좋은 스코어로 보답한다. 우리네 인생살이의 평범한 교훈을 이 골프코스에서 배울 수 있다.

한여름으로 접어드는 6월 9일, 다시 한번 이 코스에서 라운드했다. 필자가 청운(?)의 뜻을 품고 이국 땅에 자리 잡은 골프스쿨로 건너온 지도 벌써 10개월. 그동안 골프 실력이 많이 늘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영어 실력 역시 그렇게 많이 좋아진 것 같지는 않다. 골프랑 영어 가운데 어떤 게 더 어려우냐고? 그것도 대답하기 어렵다. 그러나 이것만큼은 확실하다. 대니와 필자는 첫 라운드 이후 흉허물을 터놓는 친한 친구가 됐다. 골프는 이런 점에서 나이와 국경, 그리고 성별을 뛰어넘을 수 있는 또 하나의 커뮤니케이션 도구임을 실감한다.
또 한 가지, 예전처럼 페어웨이 위에 호박을 굴리고 다니는 일은 더 이상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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