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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론 가죽처럼 때론 실크처럼…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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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호 28면

353개의 종이 기둥을 이용해 설계한 ‘페이퍼테이너 뮤지엄’

‘사랑은 연필로 쓰세요’라는 전영록의 노래가 떠오른다. 지우고 또 지우며 고운 편지지에 연애 고백을 하던 때가 있었다. 보고 난 신문은 벽지로, 포장지로, 휴지로 쓰임새가 무진장했다. 글씨 연습을 하던 누런 연습장, 다양한 종이로 만들던 딱지… 흔하디 흔한 것이 종이였다.
하지만 이제 종이는 점차 사라지는 옛 물건이 돼 간다. 어느덧 종이란 아련한 추억을 자극하는 소재가 되어버렸다. 최고 스피드의 인터넷을 하며 컴퓨터가 없으면 못 사는 우리에게 종이는 역으로 촉감과 숨결이 살아있는 감성의 사물로 다가온다.
 
종이로 만든 미술관도 있다
지난해 올림픽공원 안에 문을 연 ‘페이퍼테이너 뮤지엄’. 이름에서 알 수 있듯 페이퍼와 컨테이너로 만든 공간이다. 놀랄 만한 것은 바로 종이로 만든 353개의 기둥이다. 방수ㆍ방염처리가 된 종이 기둥은 대리석 기둥 못지않게 장엄하고도 굳건히 미술관을 받치고 있다. 하늘하늘하고 얇아서 가끔 손가락을 베이게 하는 종이가 모여 웅장한 건물이 되다니.
‘페이퍼테이너 뮤지엄’을 설계한 일본 건축가 시게루 반은 종이 기둥을 이용해 친환경적인 건물을 이끌어냈다. 의자와 탁자, 작은 소품은 물론 건축물까지 종이를 이용할 수 있다는 것을 눈앞에서 확인시켜 주었다.
골판지를 이용한 ‘이지 에지(Easy Edges)’는 ‘빌바오 미술관’으로 이름난 건축가 프랭크 게리가 만든 대표적인 가구다. ‘그깟 종이가 내 몸무게를 지탱할 수 있을까’ 하는 의심은 접어도 좋다. 수려한 선이 돋보이는 ‘위글 사이드 체어(Wiggle Side Chair)’의 경우 60여 개의 층으로 이루어진 골판지가 앉는 사람의 체중을 분산해 보기와 다르게 꽤 튼튼하다. 상자를 만들 때 이용하던 값싼 골판지의 새로운 탄생이나 다름없다. 실제로 1972년 당시에는 저가 가구로 제작되었다고 한다. 92년 유명한 가구회사 ‘비트라’가 재생산하면서부터는 독특한 소재와 디자인으로 특별한 가구로 대접받고 있다.
일본 디자이너 이사무 노구치가 만든 종이 조명, ‘아카리(Akari)’ 또한 종이의 변신이라고 할 수 있다. 현대적인 조명 디자인에 종이만이 가지고 있는 따스한 성질을 결합해 동서양의 감성을 모두 살린, 20세기를 대표하는 조명기구가 되었다. 특히 뉴욕과 유럽에서 동양 메뉴를 선보이는 레스토랑이라면 하나같이 이 조명이 달려 있을 정도다.

박소희 리포트-종이의 변신

종이 조명 ‘아카리’. 골판지로 만든 ‘위글 사이드 체어’. 프랭크 게리의 골판지 의자 ‘이지 에지’. 종이 레이스 커튼. 아코디언 카드·펜 홀더. (위쪽부터)

신기술로 거듭나는 종이
‘페이퍼테이너 뮤지엄’의 종이 기둥처럼 종이에 특별한 처리를 해 더욱 강하고 특색 있는 신소재로 거듭난 경우도 있다. ‘원 바이 원(one by one)’이라는 조명은 폴리에스테르 멤브레인으로 여러 번의 강화 공정을 거쳐서 찢어지지 않고 불이 붙지 않는 종이를 이용했다. 겹겹이 쌓인 종이가 빛을 반사하는 역할까지 해 빛과 종이의 경계가 모호한 신비로운 작품을 보는 듯하다. 네덜란드 디자이너 토르트가 신비로운 감각을 담아 디자인한 ‘미드서머 셰이드 라이트(Midsummer Shade Light)’ 역시 내구성이 강한 타이벨이라는 종이를 사용해 레이스처럼 보이는 갓을 완성했다. 17세기와 18세기의 화려함을 동경한 그는 레이스 디자인을 활용해 색감이 있는 종이 커튼에까지 도전했다.
다이어리와 같은 문구 제품도 고급 종이의 희소성과 제작 과정의 장인정신을 강조한 제품들이 사랑받는 추세다. 지디 인터네셔널에서 7월에 수입할 ‘페이퍼 블랑스’라는 수공 수첩은 언뜻 보면 오래된 가죽이나 실크 소재의 패브릭처럼 보이나, 이는 모두 100% 종이다. 브랜드의 창시자가 힌두교인이어서 가죽 소재는 전혀 사용하지 않는다. 이외에도 아코디언처럼 양면을 붙여 접으면 납작해지고 펼치면 부드럽게 확장되는 문구 홀더 또한 재미있는 아이디어와 종이라는 소재가 만나 탄생한 대표 제품이다. 이제는 종이로 만든 옷과 장신구까지 나온다.
종이는 더 이상 글씨를 담고 있는 공간에 머물지 않는다. 새로운 형태와 의미를 지닌 종이로 변화하고 있다. 신기술과 기발한 아이디어가 더해진 종이를 주목할 때다.

문의 모마온라인스토어(1588-0360 www.momaonlinestore.co.kr), 지디 인터네셔널(02-3446-1540), 까르텔 앤 비트라(02-548-3467), 에이후스(02-3785-08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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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소희씨는 사람과 사회의 라이프 스타일 변화에 감각의 촉수를 뻗어두고 있는 패션·라이프 스타일 전문 프리랜서 기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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