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분수대] 바이러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1면

바이러스(Virus)는 라틴어로 '미친개의 침'에서 비롯됐다. 서양인들은 오래 전부터 개나 말이 미쳐 날뛸 때 인간도 비슷한 병에 걸린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광견(狂犬)의 침을 사람에게 병을 옮기는 존재로 여긴 것이다. 기원전 20세기 메소포타미아 법전에는 광견이 사람을 물어 죽였을 경우 처벌받는다는 기록도 남아 있다.

인간과 동물 모두에게 감염되는 질병, 인수공통전염병(人獸共通傳染病)은 문명의 산물이다. 집단생활을 시작한 인류는 식량이나 애완용.교통수단으로 야생동물을 길들여 나갔다. 기원전 5천년부터 근대까지 전 세계에서 소.돼지.양.염소.말 등 14종의 대형 초식동물이 가축이 됐다. 이 과정에서 동물의 병원체가 인간에게 옮았다. 동물을 복종시켜 채취.수렵 생활보다 풍요로워진 대가로 그들의 공격을 받은 것이다.

인류가 점차 동물의 병원체에 적응하고 생물학이 발전하면서 이런 병의 위협은 사라지는 듯했다. 하지만 얼마 전부터 공포의 병원체가 지구촌 곳곳에서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인간이 얼마 남지 않은 처녀지에 침입하거나 자연과 인간의 균형을 깨는 대규모 산업을 일으킨 탓이다.

1998년 말레이시아의 한 돼지농장에서 괴질이 퍼져나가 반년 만에 1백여만 마리의 돼지가 살(殺)처분되고 1백명 이상이 숨졌다. 역학조사 결과 야생 박쥐가 돼지를 물면서 생겨난 니파바이러스가 병원체로 밝혀졌다. 20세기에 네 차례나 대유행한 조류독감 바이러스는 중국 같은 인구밀집 지역에서 대규모 오리.닭 사육이 이뤄지면서 출현한 변종으로 추정된다. 치사율이 90%에 이르는 에볼라 바이러스 역시 중앙아프리카 밀림 등지에서 벌목이 벌어지면서 유행했다. 브라질의 아마존강 유역에 금광 채굴업자들이 들어가면서 여우끼리만 전염되던 질병(레시매니아)이 퍼진 사례도 있다.

인간과 야생동물이 같이 걸리는 질환은 1백여 종, 인간과 가축의 공통 전염병은 3백여 종 정도다. 국내에서 조류독감이, 미국에서 광우병이 창궐하는 요즘이다. 앞으로 또 어떤 전염체가 출현할지 모를 일이다. 인류에겐 두 가지 길이 있지 않을까. 대항 기술이나 의학을 끊임없이 개발하든지, 필요 이상의 욕심을 줄이든지.

이규연 사회부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