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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책읽기Review] CIA와 맞선 '현상금 사냥꾼' 더위를 사냥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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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0면

어벤저(원제:Avenger)

프레더릭 포사이스 지음, 이창식 옮김

랜덤하우스코리아, 448쪽, 1만2000원

무더위철을 겨냥해 쏟아지는 장르소설 중 단연 눈길을 끄는 작품이다. 영국 태생인 지은이는 작품 중 '자칼의 날' '오데사 파일' '니고시에이터'가 영화로 만들어지는 등 세계적인 추리작가의 한 사람. 국내에도 탄탄한 독자층이 있지만 작품을 워낙 띄엄띄엄 발표해 아쉬움을 주던 터였다. 한국에서는 4년 만에 선보인 이번 소설은 그런 갈증을 덜어주면서
노장의 입담이 여전함을 보여준다.

1995년 내전이 한창인 동부 유럽의 보스니아에서 자원봉사를 하던 미국 청년 리처드 콜렌소가 무장단체에 의해 잔인하게 살해된다. 똥물 구덩이 속에서. 이것이 이야기의 발단이다. 캐나다의 대부호인 콜렌소의 외할아버지 스티븐 에드먼드는 하나뿐인 외손자의 죽음을 밝히기 위해 영국 에이전시를 고용하지만 범인을 밝히는 데 실패한다. 그리고 6년 후 살해 현장에 있던 세르비아 청년의 고백으로, 리처드가 조란 질리치가 이끌던 '조란의 늑대들'에게 살해됐음을 알게 된다. 무소불위의 돈을 가진 에드먼드는 즉시 복수를 위해 현상금을 내걸고 사냥꾼을 찾는다.

미국 뉴저지 주 페닝턴의 변호사 캘빈 덱스터. 51살이지만 철인 3종경기로 몸을 단련할 정도로 탄탄한 체력을 지녔다. 건설노동자의 아들로 베트남전에 참전해 땅굴수색대의 '땅굴쥐'로 활약한 덕분이다. 제대 후 대학을 졸업하고 단란한 가정생활을 하던 그는 딸이 파나마 출신 갱의 유혹에 떨어져 몸을 망친 뒤 살해되자 단신으로 복수를 한 뒤 사적 복수를 대신 해 주는 일을 시작한다. 그렇다. 그가 이 소설의 주인공이다. 암호명 '어벤저', 2차 대전 때 활약한 미국 전투기 이름으로 '복수자'란 뜻이니 다층적 의미를 가진 제목이다. 에드먼드의 의뢰를 받은 덱스터는 내전이 끝난 후 외국으로 도피한 조란 질리치를 찾아 나선다.

소설의 전반부는 리처드의 죽음과 에드먼드의 수색, 질리치의 만행과 덱스터의 인생역정이 엇갈려 전개된다. 이 과정에서 미국인들도 거의 들어본 적이 없다는 '땅굴쥐'들의 비화나 보스니아 내전에 대한 생생한 묘사가 현실감을 더한다. 여기에 곁들여진 2차 대전 당시 전투기 조종사로 활약한 에드먼드 이야기, 캄보디아 난민과 흑인 소년 해커를 덱스터가 구해주는 에피소드는 언뜻 한가한 인상을 주지만 결국은 의도적 복선으로 드러나 감탄을 자아낸다.

그러나 이렇게 끝나면 밋밋하다. 수수께끼를 푸는 지적 재미도 떨어지는 데다 독자에게 대리만족을 주는 현란한 액션이나 화려한 여성 편력도 없어서다. 여기서 이야기꾼으로서 포사이스의 장기가 드러난다. 기자생활에서 우러난 국제정치 통찰력을 바탕으로 현실과 허구를 교묘하게 엮어내는 솜씨가 그것이다.

이 소설에선 미 중앙정보국(CIA)이 개입한다. 중동의 테러 위험분자인 오사마 빈 라덴을 주목하던 CIA는 질리치를 미끼로 라덴을 제거하려는 '송골매 프로젝트'를 추진한다. 당연히 그들에게 질리치는 소중한 존재다. 남미의 산 마르틴 공화국에 은거한 질리치를 생포해 미국으로 압송하려는 덱스터와 질리치를 보호하려는 CIA간에 치열한 머리싸움이 벌어지는데….

작가의 식견이 번득이는 대목이 여럿 눈에 띄어 단순한 장르 소설 수준을 넘어선다.

"베트남에 파견된 (미군)병사들의 90퍼센트는 베트콩 코빼기도 못 보고 총 한 방 쏴보지도 못할 뿐만 아니라 총성도 한번 들어보지 못한다…전쟁에서 이기기 위해 한 명의 병사를 밀림 속으로 보내려면 아홉 명의 병사가 요리와 세탁과 잡역으로 뒤치다꺼리를 해야 한다"

"미국은 (보스니아에)평화유지군을 창설했다. 지킬 평화도 없는 곳에 평화를 지킨다고 군대를 파견하는 미친 짓이었다. 그러고는 그들이 평화를 만드는 것을 금지하고 도살자들의 만행을 간섭하지 말고 감시만 하라고 명령했다."

이런 구절들이 미국에 대한 야유라면 적지 않은 한국인들이 고개를 끄덕일 대목도 보인다.

"대권을 잡았던 자가 그것을 잃기 시작하면 모든 이성이 마비되는 현상을 보인다. 용기.의지력.지각.결단력, 심지어 현실을 의식하는 능력까지도 마치 파도가 휩쓸고 지나간 모래성처럼 모두 상실하게 된다."

"테러리즘엔 증오가 첫 번째로 오고, 그 다음에 원인이 오고 그 다음엔 목표.방법이 오고 맨 마지막으로 자기정당화가 온다." 이 정도면 정치학 교재라 할 만하다.

의미심장하게 2001년 9월10일로 마무리되는 이 소설은 2003년 발표됐다. 장르 소설치고는 뒤늦게 소개되는 편이지만 여름밤 잠 못 드는 이들에게 딱 맞는 선물이다.

김성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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