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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산의톡톡히어로] 오척 단구에 한쪽 다리 짧은 귀족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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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스페이스 오페라라는 간판에서 떠오르는 것은, 온갖 이야기 요소들을 커다란 그릇 안에 쏟아부어놓고 형광색 조미료를 뿌린 다음 마구 흔들어 섞어놓은 요란뻑적지근한 정체불명의 오락물이다. 그렇게 섞어서 접시에 부어놓은 결과물이, 수십 가지 맛이 뒤섞였을 뿐인 불량식품이 아니라 익숙하고도 독특한 자기 만의 맛을 낼 때, 그것은 '좋은' 스페이스 오페라가 된다. '마일즈의 전쟁'(로이스 맥마스터 부졸드 지음, 김상훈 옮김, 행복한책읽기)은 명명백백한 스페이스 오페라의 전형이다. 게다가, '좋은' 스페이스 오페라의 자격을 갖추고 있기도 하다.

황제와 '보르'라는 귀족 계급이 지배하는 행성 바라야에서, 섭정을 지낸 대단한 귀족 가문의 아들로 태어난 마일즈는 오척 단구에 한쪽 다리가 짧은 불구자다. 사관학교 입학을 희망했지만 신체검사에서 떨어지고 낙담한 마일즈는 소수의 가신들만을 데리고 바랴아와는 달리 개방적인 베타 클로니의 외할머니댁을 방문하러 갔다가 모험에 휩쓸린다. 이 모험은 작은 거짓말에서 시작되었는데, 그 거짓말이 점점 부풀어오른 끝에 무지막지한 전쟁과 거대한 정치적 음모에 휩쓸려 익사할 뻔 하다가 멋진 성장과 결말을 맺으며 소년은 남자가 된다.

스타쉽 트루퍼즈로 익숙한 강화복 전투, 대조적인 문화권을 보여줌으로써 선명하게 드러내는 페미니즘적 시각, 호레이쇼 혼블로워를 닮아 전략적 판단은 탁월하지만 우주 멀미가 있는 우주선 제독이 되어버린 주인공 등등은 스페이스 오페라의 화려하고 번쩍거리는 네온사인을 이룬다.

하지만 이야기 맛의 기조는 아주 오래된 전통의 재료로 유지되고 있다. '바바 야가' '대담무쌍한 보르탈리아' '바보 이반' 같은 러시아 민담식 표현들이 살아있는 행성 바라야는 제정 러시아를 연상시키며, 그에 어울리게 귀족들간의 파워게임은 대범하면서도 싸늘한 눈보라의 냄새를 풍긴다. 주인공과 비슷한 불구의 지략형 인물을 등장시킨 '얼음과 불의 노래'가 영국식 파워게임의 음험한 안개를 품은 것과는 대조적으로.

사기행각에 가까운 마일즈의 모험담은 민화적인 즐거움을 보여준다. 영리한 허풍꾼이 온갖 지혜로 난관을 피해나가다가 결정적인 위기를 맞지만, 그 위기를 넘어서자 지금껏 해온 모든 거짓말이 진실이 되는 멋진 성공의 민화 말이다. 부졸드가 SF의 거장 하인라인에 비교되는 것도 이런 이유일 것이다.

할 일을 잊지 않은 이야기꾼이 만든 이야기는 그 장르가 무엇이건간에 우리를 즐겁게 만들지 않던가.

진산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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