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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 총리,대선후보에 공한보낸 속사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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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탈법엔 본때”… 칼 빼든 「중립내각」/“송사리 잡아봐야…” 국민신뢰한계 판단/“그래도 계속할땐 사퇴도 불사” 배수진
선거중립내각이 정면돌파의 승부수를 띄웠다. 9일 현승종국무총리는 각당 후보에 공한을 보내 사전선거운동을 경고했다. 불법·탈법선거운동을 근원적으로 차단하기 위해선 각당의 후보와 직접 부닥치지 않을 수 없다는 비장한 각오에서 나온 배수진이다.
초저녁잠이 유난히 많은 현 총리는 최근 밤잠을 설쳐가며 고민했다는게 한 측근의 전언이다. 공무원들에 대한 거듭된 경고와 교육,통·리·반장 및 관변단체의 선거개입금지 등으로 어느정도 관권선거를 벗어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지만 각당의 후보를 중심으로한 불법사전선거운동이 극성을 부리는한 중립의지는 신뢰를 얻는데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현 총리는 노태우대통령으로부터 공명선거관리에 관한 전권을 위임받는 조건으로 총리취임을 수락했다고 한다. 그는 기회있을 때마다 『내 인생의 마지막 평가를 이번 도박에 걸었다』고 말하고 있다.
평생을 교단만 지켜온 그가 「도박」이라고 말할 때는 자신이 선택한 길이 초래할 모든 결과를 얼마나 무겁게 받아들이고 있는지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그러나 우리 정치현실의 탁류는 그의 의지만으로 맑아질리 없다.
중앙선관위가 경고하고 내무·법무부가 각당과 사조직의 탈법 및 불법사전선거운동 사례를 꾸준히 사법처리해 가고 있지만 정당들이 자성하는 기미는 거의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후보에게 직접적인 불이익이 미치지 않는다면 소총수 몇사람쯤 구속된다 한들 희생양이 될 수 없다는 반응이었다.
게다가 각당의 후보들은 시장·공장·농촌을 간다,유권자와의 직접대화를 한다면서 날마다 탈법선거운동을 벌이고 있다. 현행선거법대로 하면 TV뉴스에 나오는 장면장면은 모조리 탈법·불법선거운동이다. 이런 형편에 송사리 몇마리 잡아들여봐야 「눈가리고 아옹」이라는 국민의 질타를 면할 수 없고 공무원들의 중립을 소리높이 외치기도 어렵다는 것이 현 총리의 판단이다.
또한 후보들의 자숙과 협조를 얻어야 각당의 선거대책본부나 사조직 차원의 불법도 근본적으로 억제할 수 있다고 본 측면이 있다.
현 총리는 일요일인 8일 공관으로 백광현내무·이정우법무장관을 불러 자신의 이런 심경과 각오를 전하며 『후보들의 탈법행위에 대해 어떤 식으로든 대응책을 모색해 보자』고 채근했다. 자신이 기꺼이 밀알이 되겠다고 했다.
9일 공개경고서한은 바로 이같은 맥락에서 나온 것이다.
총리실의 한 관계자는 『각당이 앞으로 자숙하지 않을 경우 경고서한은 후보들을 선거법위반혐의로 입건하는 사태로 이어질 수도 있다』고 풀이했다. 이 당국자는 한걸음 더 나아가 끝내 후보들이 정부의 의지를 시험하려들 경우 현 총리는 총리직사퇴 등 모든 가능성을 고려하고 있는 것으로 안다고 전했다. 따라서 앞으로 열흘 남짓한 선거공고일전까지 각당후보가 보이는 행보는 자칫 현 총리에 의해 대통령선거 자체의 정당성을 훼손시킬만한 일로 발전할지 모른다.
물론 정부의 이같은 각오에 아직도 회의적인 시각이 적지 않다.
선거를 앞두고 의례적인 것이라하나 같은 입장인 중앙선관위가 공무원의 선거개입 중지를 요구하는 공한을 새삼 9일 정부에 보낸 점은 음미할만한 대목이다. 아직도 정부의 중립의지가 국민정서에 뿌리내리지 못했다는 것을 선관위가 증거했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중립내각이 실로 무게있는 칼을 휘두르는데는 한계가 있고 그 성과도 미지수다.
87년 대선때의 세몰이와 달리 후보들이 유권자들을 직접 만나는 것 정도는 많이 개선된 것이며 보기에 크게 거슬리는 것만은 아니라는 국민정서도 무조건 강경대응만 못하게하는 이유다. 따라서 현실을 무시한 지나친 법 적용은 자칫 어릿광대의 몸부림으로 비쳐질 위험이 없지 않다.
그러나 현 총리를 비롯한 중립내각의 생각은 다르다. 굉장히 고지식한 편이다. 어설프게 현실을 눈감아 주었더라면 어느 정당도 지금까지 관권개입을 의심하지 않는 결과를 가져왔겠느냐는 것이다. 현 총리는 다소 현실을 무시하더라도 현단계에서 원리원칙을 고집하는 것이 관권추방의 백년대계에 도움이 된다고 확신하고 있다.
옥중당선이 모든 것을 합리화해 주던 시대는 갔고 불법을 공공연히 자행해온 후보가 대통령이 되는 부도덕한 일을 용납한대서야 중립내각은 무엇하러 만들었느냐는 논리다.
정부의 이같은 강경론을 후보와 정당들이 더이상 궁지로 몰아넣지 않고 체면을 살려준다면 선거후유증의 「불행한 일」은 막을 수 있을 것이라는 바람을 중립내각은 절실히 갖고 있다.
아무튼 국무총리가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각당의 입후보예정자에게 공개경고한 것은 우리 헌정사상 처음 있는 일이다. 이제 공은 각당의 후보에게 넘어갔고 그들이 무엇인가 대답해야할 차례다.<이재학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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