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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일 노 대통령에 바란다/방인철(평기자 칼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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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외교는 현실이다. 외교는 또 내정의 연장이란 말도 있다.
그때 그때의 상황에 따라 충분히 현실을 감안하는게 외교의 요체고 무엇보다도 국내여건·국민감정·국가이익을 외교에 반영해야만 한다는 뜻이다.
최근 중국방문을 마친 일본 국왕의 왕실외교와 옐친대통령의 방일취소로 빚어진 일­러시아간의 외교마찰을 보면서 이를 실감한다.
○독도 흥정대상 소문
4일 개표가 끝난 미국대통령선거가 민주당 클린턴후보의 승리로 돌아감으로써 전통적으로 「고립주의」,또는 「국내문제 우선」에 강한 민주당의 대외전략 변경을 감안할 때 미국과 관계가 바뀌고 있는 이들 3강국의 이합집산은 우리의 주목을 끌기에 충분하다.
이번 아키히토(명인) 일왕의 중국방문은 외견상 큰 성과를 거둔 셈이다.
지난해 여름 동남아시아 순방을 통해 전후청산을 마친데 이어 이번 중국방문(10월23∼27일)에서도 예의 「심심한 사과」의 뜻을 중국국민에게 전하는 「진사외교」를 폈다.
지난 90년 5월 노태우대통령의 일본방문때는 「통석의 념」이란 모호한 「말씀」을 준비했던 일본은 23일 저녁 양상곤국가주석이 주최한 만찬석상에서는 한걸음 나아가 『중국 국민에게 다대한 고난을 끼친 불행한 한 시기가 있었다. 이에 깊은 아픔(심감통심)을 느낀다』고 표현해 중국인민의 「열렬환영」을 끌어내는데 「큰 성과」를 거뒀다.
일본 언론들은 28일 아키히토가 귀국하자 「일·중,새역사 시작되다」로 방중을 크게 평가하는 한편 「다음은 한국」이라는 논조를 폈다. 일본 정부로서는 동북아시아의 새질서 구축을 위해 「일왕」이 한국까지 방문함으로써 일본의 위신을 살리고 전후에 가져온 가해자콤플렉스에서 하루 빨리 벗어나고 싶은 속셈이 있는 것이다.
○일 국왕초청 신중히
한편 북방영토문제가 「목의 가시」처럼 걸려있는 대러시아 관계에서는 오히려 「영원한 우방은 없다」는 식으로 후퇴하고 있는게 저간의 사정이다. 옐친대통령이 11월중으로 한국과 중국을 방문할 계획임에도 불구하고 일본방문은 취소한 여파지만 상황은 더욱 악화될 조짐이다. 러시아 내부에 영토반환을 거부하는 보수파의 여론이 더욱 힘을 얻어가고 있는 탓이다.
일본내 학자나 관계당국자들은 이래서는 안된다,러시아는 냉전시대의 패자로 결판난 만큼 냉정하게 원조도 끊고 「눈에는 눈」식의 강경대응을 하자는 의견까지 나오고 있다. 마치 로일전쟁 직전의 상황같다.
이처럼 동북아시아의 패권을 둘러싸고 일·중·러가 새로운 편가르기를 하고있는 상황에 노 대통령은 중국방문에 이어 8일에는 일본방문,이어 옐친대통령 방한 영접준비를 서두르고 있다.
문제는 우리정부가 북방정책을 정권적 차원에서 서두르는 나머지 우리가 지켜야할 무엇인가를 크게 잃지 않도록 해야한다는 점이다. 「의심암귀」란 말이 있지만 적어도 식민지의 쓰라린 경험을 갖고있는 우리 처지로서는 이들 3강국의 속셈을 아무리 의심해도 지나치지 않다.
최근 일본내에서는 노 대통령의 방일과 관련,일본측으로부터 일본정부의 기본노선인 북방영토의 조기반환 정책에 한국정부가 호흡을 같이해 줄 것을 바라는 대신 한일간에 영토분쟁의 소지가 있는 독도문제를 거론하지 않겠다는 「상호양해」를 해두자는 제안이 막후에서 이루어질 것이라는 관측이 나돌고 있다 한다.
여기서 생각해야 할 문제는 우리의 국가이익이다. 엄연히 우리의 영토인 독도를 흥정의 대상으로 할 수는 없을뿐더러 러­일간의 영토분쟁에 속없이 휘말려 들어가는 것도 어리석은 일이다.
이런 미묘한 시점에서 이상옥외무장관이 지난달 31일 구소련지원회의에 참석한 자리에서 일왕의 조기방한실현을 위해 노력하겠다고 한 것은 너무 경솔한 행동이라고 할수 밖에 없다. 국민감정이 일왕의 방한을 원하지 않는다는 것은 뻔한 사실로 자칫 외교치레로 방한을 간청했다가 일본측의 적극의사로 정작 방문실현이 구체화될 때 어떻게 변명하려는지 걱정이 앞선다.
일본내 일부 여론이 아키히토의 중국방문을 앞두고 오히려 적반하장격으로 인권문제 해결과 함께 첨각열도의 일본 영유권인정을 전제조건으로 들고 나왔다는 사실을 웃어 넘길수 만은 없다. 89년 천안문사건으로 실추된 국제적 위신을 일본과의 유대강화로 회복해 보자는 중국지도자의 속셈이 방중을 서두르게 한데도 그 원인은 있다.
○국민감정 생각해야
그러나 전혀 처지가 다른 우리정부가 나서서 일왕방문을 재촉하는 인상을 심어줄 필요가 있는가. 이를 기화로 엉뚱하게도 우리는 원하지도 않는 일왕의 한국방문 문제를 일본 우익이 먼저 거론,오히려 독도가 일본영토라고 강변하지나 않을까 두렵다. 짐짓 감춰 두고있는 한일간의 해묵은 현안인 독도문제는 언제라도 터질 수 있는 「휴화산」임을 잊어서는 안된다.
행여 이번 노 대통령 방일에서 인사치레라도 일왕의 방한초청문제를 언급해서는 안된다. 그게 우리의 국민감정이다.<특집부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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