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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노재현시시각각

온달도 신데렐라도 이젠 없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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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우리가 어릴 적에 많이 읽던 서양 동화의 전형적인 줄거리. 옛날 옛적 어떤 나라에 예쁜 공주가 살고 있었답니다. 공주는 외동딸이었어요. 당연히 임금님은 공주를 끔찍이 사랑했지요. 공주가 열여섯 처녀가 되자 임금님은 걱정이 태산이었어요. 사위이자 장차 나라의 왕위까지 이어받을 공주의 신랑감이 마땅치 않아서였지요. 그래서 임금님은….

이런 서양 동화를 연상케 하는 '데릴사위 공개 모집' 광고가 요즘 화제다. 1000억원대 재산가라는 60대 자영업자가 외국 유학과 사회활동 때문에 혼기를 놓친 딸(38세.대학강사)의 신랑감을 구한다는 광고를 10일 결혼정보 업체 ㈜좋은만남 선우의 홈페이지에 게재했다. 재산가는 '차남이나 막내여야 하며, 딸에 준하는 학벌과 전문 직업을 가진 남성'을 조건으로 제시했다. 딸만 둘인 집안이므로 사윗감은 아들 역할을 겸하는 데릴사위가 돼 주면 좋겠고, 기독교 신자였으면 한다는 희망도 밝혔다.

국내외에서 응모가 쇄도했다고 한다. 당황한 선우 측은 이틀 만에 서둘러 창구를 닫아 버렸다. 그런데도 무려 270여 명이 원서 접수에 성공했다. 경쟁률 270대 1이다. 접수 기간을 늘렸다면 경쟁률이 훨씬 높아졌을 게 틀림없다. 인터넷에서는 "결혼이 무슨 동물의 왕국 짝짓기냐"는 비판도 나돌았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차라리 신선하지 않은가, 결혼 '시장'에 만연한 온갖 저울질과 사실상의 정략결혼이 새삼 무슨 비밀도 아닌데, 이렇게 공개적으로 부정(父情)을 발휘하는 게 외려 정직하지 않은가라고 생각한다.

선우 측에 물어보니 270여 명 중 절반은 서류심사에서 벌써 탈락했다고 한다. 신붓감보다 나이가 어렸기 때문이다. 연하 남자와의 결혼이 워낙 흔한 요즘이지만 의뢰인은 연상을 원했다. 최연소는 29세, 최고령은 48세였다고 한다. 의사.변호사.대학교수.고급 공무원과 삼성.LG 사원 등 괜찮다는 직업을 가진 남성이 대부분이었다. 24시간 편의점 주인과 정치가 지망생도 있었고, 아이 둘 딸린 이혼남도 지원했다. 한 목사님은 "아무래도 하나님의 뜻인 것 같다"며 자신의 아들을 추천했다. 다들 장문의 e-메일로 자신의 경력과 성격, 지원 동기를 간곡히 설명했다고 선우 측은 귀띔했다. 뉴스가 외신을 탄 덕분에 미국에서 영어 지원서도 들어왔다. 아랍어 지원서까지 한 장 접수돼 선우 측은 급히 번역자를 수배하느라 애를 먹었다고 한다.

현대판 '데릴사위'소동은 1000억원대라는 워낙 많은 재산이 눈에 띄어서 그렇지 본질은 한국 사회의 오래된 세태에서 한 치도 벗어난 게 없다. 영어.아랍어 지원서가 온 것을 보면 한국만 유별나게 속물스럽다 할 수도 없다. 다만 우리 사회의 저출산 추세가 이번 일에 영향을 끼친 것은 틀림없어 보인다.

현재의 중년층 이상은 자녀를 하나 또는 둘만 낳아 기른 세대다. 그 결과 아들 같은 사위, 딸 같은 며느리를 원하는 경향이 보편화됐다. 데릴사위 소동은 그중에서 약간 유별난 케이스일 뿐이다. 중년 주부 사이에 유행하는 농담을 상기해 보라. '미친 × 시리즈'로 불리는 유머다. '사위를 아들이라 착각하는 ×, 며느리를 딸이라 착각하는 ×, 며느리의 남편을 아직도 아들이라 착각하는 ×'이 세 종류의 '미친 ×'이라는 것이다. 유머를 거꾸로 뒤집어 보면 한두 자녀만 낳아 결혼시킨 중.노년 주부의 허전함과 허탈감이 아주 진하게 풍긴다. 아들 같은 사위, 딸 같은 며느리, 결혼해도 변치 않는 아들을 간절히 원하는 심리가 빚어낸 유머다.

1000억원대 재산가의 데릴사위는 어느 사회에서나 있을 수 있는 판타지다. 한국 사회의 실제 결혼시장에선 비슷한 조건끼리 짝을 맺는 현실적인 결혼관이 이미 자리 잡았다. 선우 측이 2001~2007년 사이에 결혼에 성공한 자사 회원 8416명(4208쌍)을 조사한 결과 전문직-전문직, 교육직-교육직처럼 비슷한 직업군끼리 결혼하는 추세가 뚜렷했다. 우리 현명한 젊은이들은 이미 더 이상 온달이나 신데렐라가 되길 원하지 않는다는 증거다. 나는 이런 추세가 오히려 미덥다.

노재현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