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설

인권유린하는 국제결혼 방치해서는 안 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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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미 국무부가 최근 발간한 세계 인신매매 보고서를 통해 한국의 국제결혼 현수막을 인신매매 사례로 고발했다. 보고서는 "베트남, 절대 도망가지 않습니다"라는 글씨가 선명한 현수막 사진을 싣고 이 같은 광고가 "동남아 여성을 상품으로 묘사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또 "동남아 여성들이 국제결혼을 통해 (결혼하는 것이 아니라) 매매되고 있다"고 비판했다. 국제적 망신이며 낯 뜨거운 일이다.

지방도시 곳곳에 걸려 있는 국제결혼 현수막은 노골적으로 여성을 상품화하고 왜곡된 이미지를 심어주고 있다. '베트남 숫처녀 결혼, 비용 780만원, 초혼.재혼.장애인 환영, 65세까지 100% 성사' '일부종사(一夫從事)를 철칙으로 알고 남편에게 헌신적이다' 등의 문구는 인생의 동반자를 택하는 게 아니라 돈 주고 사는 상품을 고르라고 부추기는 듯하다. 이같이 왜곡된 정보는 남성들에게도 합리적인 배우자를 선택할 수 없도록 조장하고 잘못된 가정생활의 단초가 되고 있다.

그동안 여성단체 등은 인권유린적 국제결혼 현수막을 당장 철거하라고 지방자치단체장에게 지속적으로 요구해 왔다. 현행법상 지자체장은 신고제를 통해 음란.퇴폐적 광고물이나 미풍양속을 해치는 광고물을 관리.감독해야 할 의무가 있기 때문이다. 노력의 결과로 일부 지역에서는 현수막이 자취를 감추는 성과를 얻고 있다.

하지만 현수막을 걷어 낸다 해서 인신매매적 국제결혼까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상업적 국제결혼 중개업체들이 주선해 온 속전속결 식 국제결혼은 다양한 인권유린 문제를 낳고 있다. 여성가족부 등이 종합대책을 추진하고 있지만 실효성이 떨어지고 실행조차 지지부진하다.

이런 인권침해 문제는 향후 동남아 국가들과의 외교적 문제로 비화할 위험이 크다. 아시아의 중심국가로 뻗어나가야 할 한국이 자칫 이들 국가로부터 왕따를 당하지 않을까 걱정된다. 지자체는 당장 낯 뜨거운 현수막을 철거하자. 정부는 인권유린적 국제결혼을 해결할 강력한 정책을 힘 있게 밀고 나가기를 당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