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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술 맞추기(분수대)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세계적 테너 가수 루치아노 파바로티가 최근 이탈리아의 모데나 공연이후 수모를 받고 있다. 영국 BBC방송이 생방송으로 중계한 공연장에서 파바로티는 녹음된 음반소리에 맞춰 입술 모양만 흉내내다가 들통이 났다고 한다. TV방송용으로 흔히 사용하는 이 방식을 립싱크(Lip Synchronize),굳이 우리말로 옮기면 입술맞추기가 된다.
파바로티는 방송녹화가 아닌 공연장에서 수만명의 청중을 앞두고 입술만 달싹거리거나 소리에 맞춰 입만 벌리는 입술맞추기를 했으니 이를 눈치챈 청중들이 가만 있을리 없고 방송국 또한 계약금 환불을 요청하기까지에 이르렀다.
청중을 우롱한 파바로티의 입술맞추기 스캔들을 전해들으면서 우리는 요즘 날마다 접하는 각당 대통령후보들의 선거공약을 연상한다. 반독재·반민주니 하는 정치구호가 사라진 다음부터 정강정책이 정치홍보의 주종을 이루고 정책대결이라는 모습으로 변모된 것은 더없이 잘된 민주화시대의 정치풍토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그 정책대결이나 선거공약이란게 유심히 들여다 보면 볼수록 가슴에서 우러나는 자신의 목소리도 아니고 꼭 지키겠다는 의지도 담겨 있지 않은 입술맞추기 노래로만 들린다.
한 정당은 이사갈 때마다 생기는 번잡한 민원서류 처리를 일괄 처리하는 방안을 정책으로 내걸었다가 이미 실시중이라는 사실을 알고는 머쓱해졌는가 했더니 대학입시를 눈앞에 둔 시점에서 각당이 앞뒤를 가리지 않고 선심 교육정책을 쏟아내고 있다.
대선후보가 대전에 가면 행정수도 대전이전이 쉽사리 흘러나오고,집권만 하면 교육예산을 20조원씩 쏟아 붓고 입시지옥은 당장 사라질듯 목소리를 드높인다. 비록 육성으로 외치는 소리지만 모두가 똑같은 선심용의 비현실적인 입술맞추기 노래로만 들리는 까닭은 웬일인가.
4년전 부시 미국대통령은 스스로 교육대통령이 될 것이라고 큰 소리치면서 교육개혁을 위한 공약을 내걸었다. 그러나 교육개혁은 선거공약만으로 끝나버렸고 이젠 클린턴후보의 공격목표가 되고 있다.
비록 파바로티가 아니라도 제 목소리로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성실한 노래만 부른다면 그 노래는 아름다운 법이다. 우리의 대통령후보들도 입술맞추기노래에 급급할 것이 아니라 제 목소리로 가슴에 와닿는 성실한 공약을 내놓아야만 청중들의 환불소동이 생기지 않을 것이다.<권영빈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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