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과 외설(분수대)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예술」과 「외설」은 우리말로 발음도 비슷하지만 일반적으로 그 경계를 명백하게 구분하기가 몹시 어렵다.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다소의 음란성을 느꼈다 할지라도 예술가 쪽에서 「이것은 어디까지나 예술이다」고 항변한다면 그 나름대로 방패의 구실이 되기 때문이다. 가령 요즘 한창 미국과 일본에서 선풍적인 화제를 모으고 있는 누드사진집의 경우도 사진작가의 입장에서 「예술적인 감각」을 가지고 여성의 나체를 형사화했다고 주장하면 그것만으로도 예술과 외설의 경계는 모호해지는 것이다.
그러나 작품을 만든 예술가 한사람만 빼놓고 세상 사람 모두가 「이것은 예술이 아니고 외설이다」고 느꼈을 경우에도 그 작품이 예술로 남아있을 수 있느냐 하는 문제가 제기된다. 윤리라든가 도덕의 측면에서는 그 작품이 지니고 있는 음란성의 사회적 악영향을 고려해 널리 전파되는 것을 막아야 한다. 그러나 그것이 법의 잣대에 의해 제재되는 경우 그것을 끝까지 예술이라고 고집하는 예술가의 입장에서는 「예술에 대한 탄압」의 형태로 비쳐질 수도 있다. 그것이 문제다.
어느 시대,어느 사회고간에 예술의 현실참여 문제라든가 음란성의 문제 따위로 해서 예술작품이나 예술가가 법의 심판대에 오르게 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예술계 내부의 자율적 판단에,혹은 예술가 자신의 양식에 맡겨지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소설 『즐거운 사라』의 음란성으로 구속된 마광수교수도 「어디까지나 예술일뿐 외설은 아니다」고 항변한다. 그런가 하면 예술계의 많은 사람들은 그 작품의 지나친 성묘사를 비판하면서도 그 작가를 구속까지 한 것은 좀 지나치지 않느냐는 견해를 보이고 있다.
무엇보다 근본적인 문제는 문학의 이름으로,혹은 예술의 이름으로 사회의 미풍양속을 해치는 온갖 외설적인 표현들이 멋대로 난무하도록 방치될 수 있겠느냐 하는 것이다. 『즐거운 사라』의 경우도 「문학」을 위해 「섹스」가 등장하느냐,「섹스」를 위해 「문학」을 이용했느냐 하는 것이 쟁점이다. 아무래도 후자의 혐의가 짙기는 하지만 그래도 찜찜한 구석이 없지 않다.<정규웅논설위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