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서 가장 한산한 평양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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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뉴스위크 한국판은 창간 1주년을 맞아 특별기획으로 28일 발매된 11월4일자 호에 미국 컬럼비아대학 제럴드 커티스 교수(정치학)의 북한방문기를 게재했다. 뉴스위크 한국판 특별고문인 커티스 교수는 이달 초 뉴욕의 아시아협회시찰단의 일원으로 북한을 방문했다. 다음은 커티스 교수 방문기틀 요약한 내용이다.
아시아를 비롯해 세계 여러 곳을 다녀봤지만 평양은 이상한 연유로 내 마음속에 뚜렷이 남아 있다. 평양은 내가 본 도시 중 가장 조용했다. 고층아파트, 웅장한 기념관, 탁 트인 대로, 그리고 공칭 2백여만명이 살고 있는 북한의 수도 평양. 그러나 그곳엔 괴괴한 고요가 감돌고 있었다.
평양은 보행자의 도시다. 하루에 걸어다니는 거리와 시간이 통상 얼마나 되는지는 알 수 없지만 보행이 가장 중요한 교통수단인 것만은 틀림없는 것 같다. 1년전부터 통행이 허용된 자전거마저 보기 드물다. 나와 이야기를 나눈 한 북한관리에 따르면 자전거 한대 값이 일반 노동자의 경우 석달치 봉급과 맞먹는다는 것이다. 평양이 이처럼 고요한 것은 바로 오늘날 북한 경제활동의 저조상을 증언하는 것이다. 북한의대표적 항구인 청진을 방문했을때 항구에는 배가 한 척도보이지 않았고 부두의 하역장비도 놀고 있었다. 그보다 북쪽에 있는 나진항에는 배가 몇척 있었지만 역시 부두는 한적했다. 그곳 지방관리에 따르면 러시아와의 교역이 격감하여 지금은 하역능력의 40%밖에 가동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북한의 경제난은 감추기가 그리 쉽지 않다. 그래선지 북한 고위 관리들이 그들의 심각한 경제현실을 오히려 솔직하게 시인하여 나를 다소 놀라게 했다. 예컨대 전에는 북한의 수출선이 시장 경제원리보다는 정부의 지시에 의해 수입물량이 결정되는 사회주의 진영이었으나 지금은 그같은 북한상품의 낮은 품질로는 자본주의시장에서 도저히 경쟁할 수 없다는 설명이다.
북한의 식량사정이 어렵다는 이야기가 있지만 내가 둘러 본 곳에서는 그런 증거를 찾을 수 없었다. 주민들은 가난해 보이기는 했지만 의식주는 해결되는 것 같았다. 한국이 주장하듯 생활은 쪼들리고 경제는 위축돼 가고 있을지도 모른다(북한은 이를 부인). 그러나 그렇다고 붕괴 직전에 있는 것은 결코 아니다.
평양이 오싹할 정도로 조용한 것은 텅 빈 거리와 노는 기계 때문만은 아니다. 사람들의 침묵도 그 이유가 된다.
공산 통치 아래의 모스크바 같은 곳에서 으레 볼 수 있던 주민들의 분노와 침울한 분위기도 없다. 평양 분위기를 가장 잘 나타내는 말이 있다면 그것은 분노가 아니라 체념이다. 마치 오랜 압박의 세월을 거치며 생기를 잃은 것처럼 사람들은 주어진 상황에 조용히 순응하는 것 같이 보였다.
내가 북한에서 목격한 바로는 주민들이 분노에 가득차 통치자에게 반기를 들고 일어설 계기만 기다리고 있는 것 같은 낌새는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물론 곁과 속이 다를 수도 있고 만일 체제가 무너지기 시작하면 주민들이 어떻게 나올지는 알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한 정권의 전면적인 대국민 정보통제 노력과 반체제 인사 탄압이 국민을 온순하고 복종적으로 만드는데 효과적이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그것은 『아이들은 국가의 훌륭한 종이 되도록 훈련받았다는 소년궁전의 소름끼치는 팸플릿에서도 엿볼 수 있다.
세습체제를 구축하려는 노력이 성공할지 여부는 미지수다. 성공하면 금일성의 가장 눈부신 업적 중 하나로 꼽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아직 성공적인 권력 이양의 기반이 마련됐다는 증거는 충분치 않다. 북한정권의 가장 열렬한 옹호자들도 김정일에 대해 언급할 때는 그의 권력과 업적만을 늘어놓는다. 일례로 최근 완성된 통일 거리 주택 5만호 건설사업은 그의 공적으로 꼽힌다. 그러나 김일성은 다르다. 혁명의 영웅, 조국의 어버이, 인민의 지도자 등 그의 이름 앞에 붙는 거창한 수식어들은 그가 북한에서 어떤 존재인가를 보여준다. 내가 만난 누구도 김정일에 대해 이런 존중이 담긴 언사를 쓰지는 않았다.
김정일이 권력을 승계 받은 후 정통성 있는 후계자로서의 입지를 강화하지 못하면 북한의 모든 문제에 대한 불만이 그에게 쏠리게 될 공산이 크다. 김일성이 죽은 후 누가 위대한 지도자의 유지를 가장 잘 받들 것인지를 놓고 북한 지도부가 격심한 권력투쟁에 휘말릴 가능성이 농후하다.
북한 지도자들은 경제계획을 효율적으로 추진하고 탈냉전 세계에서 새로운 외교관계를 구축하려면 국제적 고립 상태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러나 또 북한을 외부 정보와 이질적인 사상에 대해 개방하는 일은 자신들의 정권유지에 위협이 된다는 사실도 알고 있다.
북한의 정책 결정자들과 잠시 대화를 나눠봐도 북한에는 강경파와 온건파뿐만 아니라 강·온 양파 사이의 다양한 주장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북한 지도자들은 분명 새로운 정책노선을 모색하고 있다. 그러나 그 결과 북한에는 경제· 외교정책을 둘러싸고 다양한 의견이 백출하고 있다. 그리고 이는 혼란· 모순·불확실과 격렬한 자기 방어 등으로 나타나고 있다..
북한은 외국 자본과 기술의 도입을 바란다. 그러나 북한 지도자들은 외국인의 활동을 경제특구라는 울타리 안에 한정시켜 담 밖의 일반사회에 전혀 영향이 안 미치게 할 수 있으리라는 망상에 집착하고 있다.
북한은 대일·대미 관계에 획기적 돌파구가 열리지 않는한 딜레마에서 빠져나올 수가 없다. 대일 관계정상화로 경제원조를 얻을 수 있고, 미국과의 관계 개선으로는 외교고립을 탈피할 수 있는 것이다. 물론관계정상화의 관건은 상호 핵사찰에 관한 남북한간의 합의, 바로 북한은 핵무기 개발계획을 갖고 있지 않고 남한에는 핵무기가 배치돼 있지 않다는 것을 확인해야 한다. 북한 지도자들은 남한과 사전 합의를 보지 못하면 미일과의 관계정상화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고 있는듯 하다.
미국은 핵사찰 문제가 잘 해결되면 북한과의 대화가 좀더 고위급으로 격상될 것임을 시사했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미국의 관심이 북한의 미사일 판매· 테러· 인권 등의 문제로 집중되지 않을까 하는 것이 북한당국의 걱정이다.
북한사정의 핵심을 정리해보면 ▲심각한 경제문제에 직면해있으나 ▲최고지도자의 권위는 확고하고 ▲북한정권 엘리트들은 근본적인 정책변화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으며 ▲이러한 상황들을 종합해 볼때 변화를 기대할 만도 하다는 것이다. 미국은 대북 관계에 있어서 당근과 채찍이라는 강온책을 구사해 새로운 균형관계를 이룩할 수 있는 현재의 기회를 놓쳐서는 안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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