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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ek& cover story] 시골 구석마다 빨간 자전거는 달렸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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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 초반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체신부에 "면(面)단위까지 우체국이 들어서게 하라"고 지시한다.

도시에도 전화 같은 통신시설이 제대로 깔리지 못했던 시절. 그래서 '1면 1우체국 정책'은 도서.산간 벽지 주민들을 고려한 일종의 복지사업이자, 자연스레 사회간접자본을 늘려가는 정책이었다.

하지만 나라 살림이 넉넉지 못해 정부는 묘안을 짜낸다. 자기 돈을 들여 건물 등 우체국을 세우면 체신 업무를 대행할 수 있도록 해주는 방안. 이른바 '별정우체국'이다. 전국에 깔린 3천7백여개 우체국 중 7백70여개가 별정 우체국이다.

그 과정에서 단월우체국도 66년 9월 30일 직원 8명(집배원 4명)으로 문을 열었다. 벽촌에선 나름대로 '첨단장비'를 갖추었다지만 시설과 근무 환경이 열악하기는 지금과는 비교할 수조차 없다. 집배원들은 10여년간 매일 걸어서 편지를 날랐다. 이들에게 자전거가 생긴 건 77년.

서성진 우체국장은 "오전 7시에 출발해도 오후 10시가 넘어야 돌아오는 경우가 부지기수였다"고 회상한다. 당시엔 전화 교환 업무도 우체국이 맡았다. 서너명의 여자 교환원들이 24시간 교대로 근무했다 (우체국 전화 교환원 제도는 87년까지 이어졌다).

전화가 귀한 때였다. 80년대 초반까지도 주로 마을 이장집에 전화 한대를 달아놓고 주민들이 공동으로 이용했다. 우체국에선 그들을 '(전화)취급소장'이라고 불렀다. 급한 일이라도 생기면 20, 30리길도 마다하지 않고 취급소장 집으로 달려갔다.

재미있는 사실 한가지. 당시 여자 교환원들 중 상당수가 근무 중에 배필감을 많이 찾았다고 한다. 우체국에서 교환원으로 일했던 전옥자(40)씨 회고.

"상대방은 야근이 잦은 경찰관이나 군인이 많았다. 밤에 외로우니까 상황실이나 당직실 전화 대기를 하는 그런 청년들과 통화를 하다 사랑이 싹터 결혼에 골인하곤 했다." (하지만 전씨는 인근 고등학교 영어 선생님과 연애 끝에 결혼했다)

전보 업무 역시 87년까지 우체국이 맡았다. 당시엔 우체국 직원들이 돌아가며 전보 당직을 섰다. 전화로 내용을 받아 20자 이내로 전보를 만들어 배달하는 식이다. 열에 아홉 정도는 부음 등 좋지 않은 소식들. 대개 오후 10시 정도가 되면 전보 배달업무가 끝나지만 사정이 정 다급해 보이면 자정 무렵에도 전보를 전해주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변영훈씨는 "전보를 보낸 사람들의 애타는 마음을 생각하면 그럴 수밖에 없었다"고 말한다. 그나마 다행인 건 당시 전보 배달 한건에 1천~2천원 정도의 '특사료'가 지급됐다는 점. 지금은 다 옛날 얘기가 됐다.

표재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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