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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人 정치IN] 박영선과 양복 한 벌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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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호 07면

열린우리당 박영선 의원은 빚이 많다. “정치도 빚 갚으려고 시작했다”고 말하곤 한다. 박 의원의 부채는 두 종류다. 하나는 사회에 진 빚이다. 1980년 경희대 3학년이던 그는 한 라디오 방송국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대학생 퀴즈 프로그램의 보조 MC였다. 벌이가 제법 쏠쏠했다. 그때 돈으로 한 달에 20만원 넘게 받았다.

80년이면 광주민주화운동이 있던 해다. 시원한 스튜디오에서 창밖을 내다보면 늘 땡볕 아래 데모하는 친구들이 보였다. 막연한 죄책감이 들었다. 일을 마치면 학교로 가 친구들에게 맥주와 통닭을 샀다. 그래도 미안함은 줄지 않았다. 82년 MBC에 입사한 뒤에도 부채 의식은 계속됐다.

두 번째 채무는 좀 더 개인적인 것이다. 회사 선배인 정동영 전 열린우리당 의장이 채권자다. 박 의원에게 남편(이원조 변호사)을 소개해준 사람이 정 전 의장이다. 97년 결혼 당시 LA 특파원이었던 박 의원은 얼마 뒤 중매 사례로 이탈리아제 양복 한 벌을 사들고 귀국했다. 큰맘 먹고 산 고급 옷을 짐칸에 실었다가 행여 잘못될까 비행기에 직접 들고 탔다.

그런데 정작 정 전 의장은 그 양복을 한 번도 입지 못했다. 옷이 너무 컸기 때문이다. 정 전 의장은 “덩치 좋은 자기 남편 사이즈에 맞춰 사왔더라”고 말했다. 결국 제대로 사례를 못한 셈이 됐다. 그렇게 세월이 흘렀다.

2004년 1월 11일. MBC 부장이던 박영선은 전화를 한 통 받았다. 이날 치러진 열린우리당 의장 경선에 출마한 정동영이었다. “오늘 내가 당선되면 축하해주고, 떨어지면 위로해달라”며 밤에 만나자고 했다. “꼭 남편과 같이 나오라”는 말도 했다. 부부는 서울의 한 호텔에서 만난 정동영에게 축하 인사를 건넸다. 그러자 정동영은 대뜸 남편을 향해 “네 마누라 내놔라”고 말했다. “내가 장가 보내줬으니 이제 빚 갚으라”고 했다. 열린우리당이 총선을 앞두고 외부인사 영입에 목말라 있을 때였다. 박 의원은 이틀 뒤 입당했다.

선거기간 내내 그는 정동영의 곁을 그림자처럼 따랐다. 시장통에 가면 상인들이 “두 사람 부부 아니냐”고 종종 물어볼 정도였다. 정 전 의장은 그를 “가장 신뢰하는 정치적 동지”라고 불렀다.

박 의원이 마음의 빚을 진 사람이 또 하나 있다. 정운찬 전 서울대 총장이다. 경제부 기자 시절 자신의 ‘멘토’였다고 했다. 국회에 들어와서도 경제정책에 관한 각종 조언을 구했다. 그는 정동영ㆍ정운찬 두 사람을 맺어주려 무척 애를 썼다. 지난해 2월 정동영이 두 번째로 열린우리당 의장에 당선된 직후 공개적으로 서울대에 찾아가 당시 총장이던 정운찬과 만난 것도 그의 작품이다. 박 의원은 “두 사람이 (대선 주자로서) 정정당당하게 겨룰 수 있기를 바랐는데 잘 안 됐다”고 회상했다.

그는 “이번 대선의 시대정신은 한반도 평화”라며 “정동영이 여기에 가장 적합한 인물이란 걸 알리는 것이 내 역할”이라고 말했다. 정 전 의장이 대선에서 승리할 경우 두 사람의 채권-채무 관계는 뒤바뀌게 된다. 물론 현재의 지지율로는 쉽지 않은 일이다.

정 전 의장 문제는 그렇다 치고 사회에 진 빚은 어떻게 됐는지 궁금해졌다. “갚는다고 갚았는데… 여성ㆍ보육 문제 등 아직 할 일이 많다”고 답했다. 이래저래 그가 ‘빚쟁이 정치인’ 신세 면하려면 넘어야 할 산이 많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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