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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7)"평범하게 살고팠다"|청와대 생활 중 얼굴 안 드러낸 둘째딸 박근영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5면

고 박정희 대통령의 둘째딸 박근영씨(38·육영재단이사장)는 스스로를 『세파에 많이 시달렸던 사람』으로 생각하고 있다. 그녀는 『평범한 여인으로 사는 것이 희망이었으나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고 말했다. 활달한 본래의 성격대로 사는 「자연인 박근영」의 삶은 애초부터 그녀의 몫이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1954년생인 그녀가 7세 때 부친 박정희 장군은 5·16을 감행했다.
아버지가 최고회의 의장을 거쳐 대통령이 되자 근영씨는 장충 국민학교에서 청와대와 가까운 청운 국민학교로 전학했다. 명문 경기여중·경기여고를 거쳐 73년 서울대음대 작곡과에 입학했다.

<언니 근혜씨 영향 커>
10·26후인 82년9월 유찬우 풍산금속회장의 장남 유 청씨와 중매반 연애반으로 결혼했으나 얼마 뒤 헤어졌다.
『학창시절에는 그저 구속받지 않고 자유분방하게 생활하고 싶었어요. 경호원이 따라다니는 것이 싫었고… 친구와 길을 가다 갑자기 시내버스에 올라탄다든가, 제과점에 불쑥 들어가 몰래 뒷문으로 빠져 나온다든가 하는 방법으로 경호원아저씨를 따돌리곤 했지요. 그분들이 상급자들한테 꾸중들을 것이라는 생각보다 고소한 생각이 앞설 정도로 철이 없기도 했습니다. 여중시절, 우리나라를 방문한 외국 귀빈들이 아버님께 선물한 자기나라의 귀한 음반들이 내 차지가 된 적이 많았어요. 마오리족(뉴질랜드원주민)의 토속음악이라든가 클래식음반들이 기억나는데, 그때 나는 팝송에 빠져 있을 때라 그 음반들을 서울시내로 들고 나와 레코드가게에서 팝송음반과 맞바꾸기도 했지요. 물론 가게주인들은 내 신분을 몰랐고요. 언니(근혜)는 나보다 훨씬 더 공부에 파고드는 성격이었습니다. 언니의 영향을 많이 받았어요. 성당도 언니의 영향으로 다녔고 「우에라구에리카」라는 이름의 스페인국적 신부님으로부터 중학교때 영세(천주교의 세례의식)를 받았지요. 부모님은 우리의 종교선택에 대해서는 전혀 간섭이 없었어요. 아버님께 영세 받았다는 말씀을 드리니까 농담을 한마디하시더군요. 「다 좋은데, 그 신부님 이름은 왜 그리 우굴쭈굴하냐」고요.』
오랫동안 전차나 버스로 통학했고, 경호팀의 건의로 부득이 승용차를 이용할 때는 학교정문에서 얼마간 떨어진 곳에서 차를 내렸다. 다른 학생들과의 위화감을 염려한 육영수여사의 배려였다.

<작곡가 과외 받아>
60년대만 해도 서울시내에는 변두리 산간지대에서 토굴생활을 하는 영세민들이 있었고, 거리에는 거지· 부랑자들이 특히 많았다.
『여중시절 어느 날 학교에서 돌아오다가 광화문 근방에서 7세 가량 돼 보이는 거지아이를 보았어요. 감수성 예민한 그 나이의 동정심이 발동했는지 그 남자아이를 우리 집(청와대)에 데려왔지요. 어머님이 처음엔 놀라셨다가 곧 나를 칭찬하면서 사람을 시켜 아이를 씻어주고 먹을 것도 주고 냄새나는 옷은 다른 것으로 갈아 입혀주셨습니다. 집이 어디쯤인지도 알아두었고요. 후에 경호원아저씨가 어머님의 지시로 그 아이가 말한 동네를 찾아갔는데 홍은동 산꼭대기의 한 토골이더랍니다. 아이는 구걸하는 조직의 일원이었고, 경호원이 찾아갔을 때는 굴속에 살던 이들은 모두 달아나고 없더라는 보고였습니다. 아이가 청와대를 다녀온 것을 알고 겁이 났던 것이겠지요. 내 동정심 때문에 그들 나름의 생활터전을 빼앗은 결과가 돼 마음이 아팠습니다.』 근영씨는 국민학교때 이미 피아노를 익혔다. 고교시절은 때마침 우리나라 가요계에 통기타 바람이 거세게 불던 때였다. 그녀도 남들처럼 송창식·윤형주·양희은·김세환씨 등 포크송 가수들을 매우 좋아했다. 삼엄한 경비속의 청와대 깊숙한 곳에 살던 대통령의 세 자녀에게도 통기타 붐이 일었다. 그중 지만군이 기타를 가장 잘 쳤다. 경쟁적으로 기타를 배운 삼남매는 어떤 의미에서는 당시의 정치적 억압에 대한 젊은이들의 탈출구이기도 했던 「청바지가수」들의 노래를 즐겨 불렀다.
『나는 양희은씨의 「아침이슬」이 금지곡이 된 줄 몰랐어요. 물론 알았다고 해도 계속 불렀겠지만. 여하튼 그 노래를 끔찍이 좋아했습니다. 어머니께서도 좋아해 가사를 따라 부르시곤 했지요. 나는 기타보다 피아노쪽이라 공부하다 쉴 때면 피아노로 가요반주를 많이 했습니다. 어머님이 가장 좋아하신 노래는 「보슬비 오는 거리」와 「당신을 알고부터 사랑을 배웠답니다…」로 시작되는 곡이었어요. 내가 이런 노래를 연주할 때 어머님이 집무실 창문을 열고 「근영아, 그 곡 한번만 더 쳐봐라」 고 주문하시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대학진학을 앞둔 경기여고 3학년시절 근영씨는 불문과와 음대를 놓고 고민했다고 한다. 종교와 마찬가지로 자식들의 진로문제에 대해 박 대통령 부부는 본인의 뜻을 존중하는 편이었다. 어릴 때부터의 적성을 감안해 음악을 전공으로 택하기로 결정했다. 인문계 여고를 다닌 탓에 음대지망생인 그녀는 지명한 작곡가 김성태씨로부터 따로 화성법을 레슨 받았고, 무난히 서울대에 합격했다. 당시는 과외공부가 일반화되었던 때였지만 그녀는 『혹시 아버님께 누가 되지 않겠느냐』며 지금 와서 이런 사실이 밝혀지는 것을 쑥스러워 했다.
74년 광복절 피격사건으로 육영수여사가 세상을 떠났을 때 근영씨는 대학2년생이었다, 서강대를 졸업하고 프랑스에 유학 중이던 그녀의 언니 근혜씨는 곧바로 국내에 들어와 육여사 대신 퍼스트레이디 역할을 맡아야 했다.

<「비밀거울」로 감시>
긴급조치로 이어지던 유신체제가 점차 가파른 고비로 접어드는 시점이었다.
『한때 제가 대학시절 데모에 가담했다는 소문이 퍼진 적이 있었어요. 당시 대학가의 학생시위가 거셌고, 나도 데모 때문에 차단된 교문 밖으로 나오지 못한 적이 종종 있어서 그런 소문이 났던가봐요. 한번은 학과에서 주동학생들이 「민주주의 장례식」이라고 기억되는 문구가 쓰인 검은 리번을 만들어 전원에게 나누어주면서 가슴에 달자고 호소한 적이 있었어요. 남들처럼 나도 리번을 달고 다녔지요. 그 정도일 뿐이지 어떻게 대통령의 딸이 데모를 하겠습니까. 나라살림을 발전시키려고 밤낮으로 번민하시는 아버님을 매일 대하는 처지에서 말입니다. 3학년 때는 서울대 음대 캠퍼스가 을지로에서 신림동 관악캠퍼스로 이전했어요. 그러자 두 동료들이 데모를 쉽게 막으려고 관악산 기슭에 서울대생들을 몰아 넣었다」고들 비판하더군요. 집에 돌아와 저녁 식사하는 자리에서 이 얘기가 나왔어요. 아버님께서 「장기계획을 세워 넓은 캠퍼스를 확보해 주었더니 고작 데모 때문이라는 말이 나오느냐」며 어이없어 하시더군요.』
대학시절에도 근영씨의 「경호원 기피증」은 여전했다. 그녀가 질색하는 것을 잘 아는 경호원들은 당사자가 눈치채지 못하게 감시하느라 적지 않은 곤욕을 치러야 했다. 그 때문에 음대입구 수위실에 대학당국의 양해를 얻어 비밀거울을 설치했다가 근영씨에게 들키기도 했다. 26면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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