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공포 드라마’ 권하는 한국 사회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13호 15면

일러스트 강일구

SBS 드라마 ‘쩐의 전쟁’ 때문에 사자성어가 유행이라는데, 유감스럽게도 내 머리에 가장 먼저 떠오른 두 가지는 ‘이판사판’과 ‘사방팔방’이었다. 첫 번째는 인생관이고, 두 번째는 연애관이라 했던가? 이렇게 허탈할 데가. 그게 맞고 안 맞고를 떠나서 아무튼 대충대충 살다 보니 나이 마흔의 인생에 남은 건 앞날에 대한 두려움뿐이다.

이윤정의 TV 뒤집기

우연히 ‘쩐의 전쟁’과 함께 일본 추리작가 미야베 미유키의 ‘화차’를 읽었다. 1990년대 초 거품경제가 사라진 일본에서 카드 빚에 몰리다 사채이자를 쓰게 된 한 처녀가 신분을 조작하기 위해 다른 처녀를 토막살인한다는 내용이다. 으스스한 살인사건의 주인공이 얌전해 보이는 옆집 처녀이며, 그 처녀는 단지 행복해지기 위해 물건 몇 가지를 샀을 뿐인데 인생 막장에 몰리는 이야기를 보니, 남의 일이 아니다. 보통예금 통장만 쥐고 있다가 마이너스 통장으로 내려앉고, 다시 현금 서비스에 발을 들이게 된 내 인생. 돈 때문에 얼마나 끔찍한 일이 벌어질 수 있을지 두려워졌다.

그래선지 ‘쩐의 전쟁’ 역시 ‘이판사판’ 살아 겁만 남은 내게는 금나라(박신양 분)가 사채업계의 영웅이 되는 히어로 드라마(영웅극)라기보다는 돈에 대한 무시무시한 두려움에 근거한 공포 드라마로 느껴진다.

그뿐이랴. ‘내 남자의 여자’ 같은 불륜드라마 역시 내 나이 때 사람에게 가장 두려운 불륜의 공포를 자극한다. 돈과 불륜. 한편으로는 욕망과 환상을 품으면서도, 그것의 폐해로 일생이 망가질 수 있는 두려움을 가진 것들이다. 사채 빚도 무섭고 사채업자도 무섭다. 남편이나 아내가 바람피우면 얼마나 끔찍할까 무섭다.

하지만 돈은 벌고 싶다. 불타오르는 듯 영혼이 이끌리는 사랑도 한 번쯤 해보고 싶다. 그래서 이들의 공포에 근거한 판타지가 사람들을 자극하는 게 아닐까 싶다. 광고업계에서 가장 잘 먹히는 요소가 ‘공포 마케팅’이라더니 드라마에서도 대중이 무의식적으로 지닌 공포를 자극하는 게 포인트로 등장한 듯싶다.

그러니 불륜을 조장하고 사채업자에 대한 환상을 키운다고 드라마를 욕하기보다는, 그런 독한 소재들이 우리의 관심을 끄는 현실을 탓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몇 년 전만 하더라도 인간의 얼굴을 한 사채업자가 주인공인 드라마나, “셋이 같이 살면 안 될까”라고 말하는 뻔뻔한 정부(情婦)는 상상하기도 힘들었을 텐데. 독해진 드라마의 근원은 돈에 대한 환상이 극에 달하고, 가정이 무너질 대로 무너져 가고 있는 바뀐 세상 때문인 듯하니 말이다.

그러니 미래의 드라마에 등장할 공포를 상상하면 더 암담하다. 아들을 특목고ㆍ일류대에 보내는 판타지를 가진 엄마들이 그걸 실현하지 못했을 때의 공포, S라인 몸매와 V라인 얼굴을 꿈꾸는 여성들의 공포, 재테크의 환상에 실패한 초라한 노년에 대한 공포. 머지않은 미래에 이런 공포 드라마가 떼로 안방에 등장하지 않을까.

또 먼 미래엔? 학원으로만 뺑뺑이 도느라 햇빛도 제대로 못 받고 자라난 아이들이 받은 평생의 스트레스로 이상성격이 양산되는 사회에 대한 공포, 뭐 이런 거 아닐까. 상상만 해도 우울하고 두렵다.

---
이윤정씨는 일간지 문화부 기자를 거쳐 영화 제작자로 활약한 문화통으로 문화를 꼭
꼭 씹어 쉬운 글로 풀어내는 재주꾼입니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