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한위임」과 공무원 비리/최철주(중앙칼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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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중소기업을 경영하고 있는 전직 고위관리의 하소연이다. 공무원의 기업체 방문이 금지된 이후 이제는 한숨 쉴 수 있겠거니 했더니 어느날 소방서에서 시간나는 대로 들르라고 하더란다. 현장검사를 생략하고 서면조사만 할테니 응해달라고 해 질문에 매끄럽게 답변했다. 며칠 후에 기술적인 점검이 필요하다면서 다시 사무실로 나오라는 연락이 왔다. 그때서야 그는 지난번 「소환」때 빈손으로 갔던 것을 후회했다.
○어느 전 고관의 하소연
그는 이번엔 잊지않고 찻값을 내밀었다. 그가 한때 서울에서 영향력있는 고급 공무원이었다는 것을 지방의 소방서요원들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경력은 결코 참작되지 않았다. 기업을 굴리려면 역시 중립내각에서도 봉투는 필수불가결의 투자수단이라는 것을 터득했다. 환경관련 공무원들의 일부 공해검사 기준은 어찌나 비현실적인지 합격판정을 받기 어렵게 돼있다고 주장한다. 그는 자신이 고위직에 있을때 공무원의 하부구조가 그토록 부패돼 있음을 미처 몰랐다고 부끄러워 했다.
또 한 전문경영인의 말은 모두를 분노케 하기에 충분하다. 최근에 자신의 공장을 처분하는데 어느 도의 승낙이 필요했다. 그러나 관련 공무원은 규정에 명시적인 조항이 없다는 이유를 들어 거푸 퇴짜를 놓았다. 오해받기 십상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가 봉투를 내밀자 그 공무원은 은밀히 안전대책도 요구했다. 중앙의 모모 부서를 찾아가 도의 적절한 조치가 필요하다는 유권해석을 받아오라는 것이다. 뇌물을 먹기 먹되 빠져나갈 구멍까지 마련해 주어야 민원이 처리된다.
정부가 공무원의 기업체 방문을 금지시키는 것은 비리가 그토록 많다는 것을 전제로 한 것이다. 5개월전에도 정부는 똑같은 조치를 취했다. 경찰서·소방서·세무서·보건소·건축허가 및 공해단속기관에 대해 기업체를 방문해야 할 때는 2인 1조의 편성을 원칙으로 한다고 시달했다.
○중립강조에 안일 우려
서로를 의심하고 감시케하는 괴이한 지침이었다. 박봉으로 버텨내고 있는 일반 공무원들로서는 이처럼 불명예스럽고 울화가 치미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중립만을 강조한 대통령이나 장관들의 말은 자칫 일선 민원부서 공무원들의 무사안일과 부패를 확대시킬 위험마저 있다.
우리나라의 성장잠재력을 키우기 위해 정부는 그동안 여러차례에 걸쳐 각종 행정규제를 완화해 왔다. 중앙정부가 해오던 인·허가권을 지방으로 넘기고 지역실정에 맞게 새로운 정책을 개발하도록 많은 권한을 위임했다. 시장개방폭은 더욱 넓어지고 국제화의 속도가 빨라질수록 지방에서 일하는 공무원들은 보다 더 많은 기능과 높은 자질이 요구되었다. 그러나 그것이 이뤄지기전에 지방자치제도가 도입되고 지역별로 여러가지 복잡한 조례가 제정,또는 개정되었다.
특히 토지와 건축관계 조례는 복잡하기 짝이 없어 법제적 완화는 무색해지고 오히려 행정관행에 의한 과도한 규제가 나타나 비리로 연결되었다. 어떤 곳에서는 행정규제 완화가 지역경제의 활력을 찾아주기보다는 시장의 실패를 가져왔다. 경남 양산의 경우 최근에 군의 건축과장 등이 준공허가를 미끼로 억대의 현금을 받았으며 그의 아파트에서 뇌물로 알려진 많은 보물상자가 발견되었다. 몇달전에는 이 지역 유흥업소의 비리와 관련해 군청과 경찰서·소방서 요원들이 검찰의 조사를 받았다.
○의식수준 높아져야
공무원 부조리에 대한 정부의 감시가 강회될수록 민원인들은 더욱 불편해진다. 기왕에 잘도 움직였던 조직이 얼어 붙어서다. 언제는 공무원들에게 산업현장을 적극 파악해 문제를 정책에 반영하라 해놓고 이제와서 부작용이 많다며 기업체방문 중지명령을 내리는 것은 되지도 않을 부정척결의 눈가림에 지나지 않는다. 1년에 대여섯번의 각급 감사반이 들이닥쳐도 「일어날 비리」는 죄다 일어난다. 모든 것이 정상적으로 돌아갈때까지 국민들이 지출하는 「대기 비용」은 계속 늘어날 것이다.
꼭 행정조직이 우수한 집단이어야 한다기 보다는 모두의 의식수준이 높아져야 부작용이 치유될 것이다. 또 무슨 묘안이 있는가.<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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