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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가 말하는 의사 '최고 인재들, 의사된 후 왜 떠나나'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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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약학과를 우수한 졸업한 이우정(가명, 31세)씨. 약사 면허 취득 후 한 대형약국에서 일해 온 지 6개월 만에 그는 서울 소재 한 의학전문대학원에 응시, 올해로 벌써 본과 2년차 생활에 접어들었다.

서울대약학과과 성균관대의대를 동시에 합격했던 그는 ‘서울대’라는 프리미엄을 놓칠 수 없어 약대를 갔지만 늘 “의사가 되고 싶다”는 마음을 끝내 지울 수 없어, 결국 의전원 입학을 감행했다고.

그러나 그렇게 간절히 바랐던 의사가 되기를 자처한 그도 요즘은 국민들이 의사에 대해 가지는 막연한 적개심과 비난 여론을 대할 때면 “잘못된 선택을 한 건 아닌가” 새삼 고민하게 된단다.

이씨는 “제가 의대 입학을 고민했던 98년 당시만 해도 이렇게 의사들에 대한 여론이 나쁘지 않았는데, 아마도 2000년 의약분업 이후 파업 여파가 큰 것 같다”며 “전문의가 되기까지 아직도 6~7년 더 걸릴 텐데 이후에는 지금보다 더 나빠지지 않을까 걱정”이라고 전했다.

◇ 의약분업 사태 따른 ‘적개심’ 여전= 이씨의 말처럼 대다수 의사들은 지난 2000년 의약분업 파업 사태를 국민들이 의사에 대해 적개심을 가진 게 된 계기라고 입을 모은다.

서울 마포구 K내과 강모 원장은 “의약분업의 폐해를 국민들에게 알리기 위해 감행했던 파업을 우리는 ‘의권쟁취 투쟁’이라 부르고 있지만, 과연 국민들은 그렇게 생각하는 지 의문”이라고 토로한다.

이 원장은 특히 “정부와 여론이 환자를 볼모로 파업한다는 식으로 몰아세우면서, 의사들을 ‘생명을 가지고 장난치는 파렴치한’으로 매도했었다”며 “그런 인식이 강하게 자리해 온 여파로 최근에는 의사를 존경한다는 사람을 쉽게 찾아볼 수 없다”고 말한다.

한 대학병원 외과 김모 교수도 “의권투쟁 당시를 돌이켜보면 상황이 허락하는 한 최선의 진료를 했었다”고 상기했다.

그는 “파업이 주원이 아니었음에도 마치 파업으로 인해 환자가 죽음에 내몰린다는 식의 아비규환식 보도가 연일 계속됐고, 당시 의사에 대해 막연히 가졌던 적개심이 지금까지도 지속되는 것 같다”고 전한다.

◇ ‘라뽀 형성 실패’로 의료분쟁 급증= 이처럼 환자가 의사에게 막연한 적개심을 갖게 되면서 환자들은 기본적으로 의사를 신뢰하지 않게 되고 이는 결국 의료분쟁까지 이어지는 수순을 밟게 된다.

서울 강남구 S정형외과 오모 원장은 "의사와 환자 사이에 가장 필요한 것은 무엇보다 라뽀(rapport, 프랑스어로 환자와 의사간의 심리적 신뢰관계)“라며 ”라뽀가 강하면 강할수록 치료 효과도 좋아지고 당연히 의료분쟁도 적다“고 말한다.

오 원장은 특히 “의대 재학 시절 때는 라뽀의 중요성을 제대로 몰랐지만, 직업·연령·성격이 천차만별인 다양한 환자를 만날 때마다 그 의미를 되새기게 된다”며 “의사가 환자와 제대로 라뽀를 형성했음에도, 과연 의사를 고발하는 환자가 있을 지 의문”이라고 말한다.

즉, 질병이라는 엄청난 스트레스로 인해 많이 힘들어하는 환자의 마음을 진심으로 헤아리고신뢰 관계를 형성하지 못해 라뽀 형성에 실패했다면 이는 곧 의료분쟁을 일으키는 전초전이 된다는 말이다.

울산의대 김장한(인문사회의학교실) 조교수와 서울의대 이윤성(법의학교실) 교수도 ‘의료와 법(E*PUBLIC 출판사)‘에서 “의료분쟁의 증가 원인이 의사와 환자 관계의 변화에 기인한다”고 역설한다.

과거에는 의사와 환자 관계가 시혜자와 수혜자의 입장과 같은 수직적 관계였고, 온정적 간섭주의(paternalism)에 기초해 환자의 병이 치료되기만 하면 또는 치료에 실패하더라도 의사가 치료목적을 가지고 한 행위라면 적법했었다.

그러나 이후 환자의 자율성(autonomy)을 존중하게 됐고 환자의 동의 없는 의료행위를 전단적 의료행위로 불법화하고, 환자의 정보 접근성이 높아져 의사가 독점적으로 보유하고 있던 의학지식이 재분배되면서 둘의 관계가 수평적으로 변하면서 의료분쟁이 증가했다는 것.

특히 저자들은 “의료의 전문화와 의료기관의 대형화에 따라 의사와 환자가 인간적인 신뢰관계를 형성없이 의료관계만 형성하게 되는 것도 역시 의료분쟁이 증가한 원인”으로 분석했다.

◇ 최고 인재들, 의사된 후 왜 떠나나=이처럼 의사와 환자가 신뢰관계를 마련하기 위해서는 의사의 인품도 한몫을 하겠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 ‘의사의 능력’일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대한민국 1% 두뇌들이 모인다는 우리나라 의대를 거쳐 정작 의사가 된 이들도 '최고 인재가 반드시 의사가 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는 점에서 아이러니가 발생한다.

한 경제지가 최근 한림대병원과 연대세브란스 전문의 106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가 이를 반증한다.

이에 따르면 '의사가 되는 데 최고 인재가 필요하지 않은 이유'를 묻는 질문에 ▲실제로 하는 일이 공부 잘하는 인재를 필요로 하지 않아서(41.4%) ▲사회적인 인식과 달리 실제 대우가 좋지 않아서(32.7%) ▲국가경쟁력 향상에 도움이 안 되기 때문(25.9%) 순으로 나타난 것.

이에 대해 한 피부과 전문의는 "최고 인재들이 의사가 되는 게 문제가 아니라 이들을 활용할 환경과 제도가 제대로 갖춰지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며 ”우리나라 의료는 환자들의 요구와 기대 수준은 점점 높아짐에도 시장경제원리에 입각한 의료서비스 투자에는 인색해 의사들의 고충이 크다“고 꼬집었다.

즉, 최고 인재들을 모아 의사로 제대로 활용하려면 '차별화된 의료 서비스'에 걸맞게 '차별화된 대가‘를 지불하는 시장경제원리가 적극 도입되기 위한 국가적 지원정책이 필요하다는 주장.

이 전문의는 “치료재, 인건비를 포함하면 원가에도 못 미치는 건강보험 수가로 인해 의사들이 병원경영을 하는데 고충이 너무 많다”며 “의사가 돈만 밝히는 것이 아니라, 돈을 벌어 직원들 월급 주려는 고민 때문에 진료실에서 맘 편히 진료만 볼 수 있는 의사가 거의 없다”고 말한다.

최근 들어 한국 의료계를 등지고 점점 미국 의사 진출을 노리는 의사들이 급증하는 것도 이런 맥락에서다. 자신의 능력을 최대한 발휘하되 보다 안정된 여건에서 환자를 돌보겠다는 것.

2006년 기준 미국의사면허 취득 정보 사이트(www.usmlemaster.com)에서 조사한 바에 따르면 매년 800여명의 우리나라 국적의 의사들이 USMLE(미국의사국가고시)에 응시하고 있다.

미국의사면허전문학원의 한 관계자는 “USMLE 준비생이 매년 120~130%정도 꾸준히 늘고 있다”며 “의약분업 이후 국내 의료체제에 크게 실망하고 반감이 높아짐에 따라 새로운 탈출구를 모색하다보니 해외로 눈을 돌리는 의사들이 늘고 있다”고 전한다.

실제로 서울 소재 한 대형병원에 재직 중으로 USMLE를 준비하고 있다는 김모(43세) 교수는 “해외로 나가 더 높은 수준의 의학을 배우고 싶은 생각에 공부를 시작했다”면서도 “해외의료시장 개방에 따라 미국계열 병원이 국내에 들어서면 미국의사면허 소지자만이 의료진이 될 수 있다는 점도 한 요인이 됐다”고 전했다.

이 교수는 “대학병원마저 협소한 의료시장 경쟁에 가세하는 현 상황에서 외국으로 빠져나가는 우수한 의사를 막기 위한 의료인력 재배치 등 특단의 대책이 필요할 것”이라고 밝혔다.

◇ 의사단체에 거는 마지막 기대= 의사에 대해 팽배한 국민적 불신·낮은 보험수가·의료시장개방의 압박 등으로 인해 의사들이 갈수록 설 자리를 잃고 있는 현실에서, 최근 터진 의사협회 로비파문은 한마디로 ‘불난 데 기름 부은 격’의 사건이었다.

대다수 의사들은 “의사협회 정관계 로비파문이 불거지면서 의료인 모두들 부도덕한 집단으로 매도하는 분위기가 한층 가열돼 의사들은 더욱 설 곳을 잃고 있다”고 토로한다.

의협 로비 파문이 불거졌을 당시 한 의료계 관계자는 “그나마 조금이라도 남아있던 의사들의 명예가 이번 사태로 완전히 바닥에 떨어지게 됐다”며 “의약분업은 의권투쟁이라는 명분이라도 있었지만, 이번 사태는 의사들을 부조리한 집단으로 매도한 도덕적 오점으로 남을 사건”이라고 분노했다.

이같이 의사들의 분노와 자괴감이 극에 달한 상황에서, 최근 의사협회는 자진 사퇴한 장동익 전 회장을 대신할 의협 회장 보궐선거가 한창이다.

후보로 나선 이들 5명 모두 너나 할 것 없이 “의료계 대내외적으로 실추된 명예를 곧추 세우겠다”고 강조한다.

한 후보는 “부도덕한 의사는 일부이고, 양심 있고 성실한 의사들이 대다수인 현재 의료계는 그래서 희망이 있다”며 “의협이 환골탈퇴 해 국민들에게 다가서는 따뜻한 조직으로 거듭나면 국민들의 마음을 다시 얻을 수 있다”고 말한다.

이에 한 개원 의사는 “솔직히 의협 회장이 바뀐다고 해서 의사들에게 가지는 국민적 불신과 열악한 의료환경이 해결될 리 만무하다”며 “마치 회장이 바뀌면 대한민국 의료계가 바뀔 것이라 믿는 것은 성급한 생각”이라고 회의적인 시선이다.

그러나 또 다른 의사는 “내년은 의협 100주년이 되는 해로, 이를 앞두고 터진 의협 로비파문은 오히려 의료계가 다시 일어서는 전화위복의 기회가 될 수 있다”며 “이런 마음에서 이번 의협 수장에 거는 기대가 큰 것도 사실”이라고 말했다.

이에 한 네티즌은 “의사들 가운데도 소신 있고 환자를 위해 고군분투하는 의사들이 많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며 “차기 의협 회장에 그동안의 국민의 오해와 불신을 회복시킬 수 있는 인물이 뽑힌다면 이번 로비파문으로 의사들이 얻는 교훈은 더 많을 것”이라고 차기 회장에 기대를 표했다.

(서울=메디컬투데이/뉴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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