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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구해설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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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한국에 프로야구가 출범하면서 생긴 새로운 직업중의 하나가 야구전문해설자다. .
프로가 시작되기 전까지만 해도 야구해설자는 아나운서곁에 앉아 묻는 말에 도움이나 주는 정도의 들러리 역할밖에 하지 못했다.
그러나 프로야구가 장기레이스를 시작, 투수·타격·수비 등 포지션별 전문화가 이루어지면서 옛날 방식의 소극적 해설로는 경기의 상황을 충분히 설명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시청자및 청취자의 구미를 충족시킬 수 없게됐다.
이에 따라 야구해설분야도 집중적인 연구를 필요로 하는 전문직으로 변했다.
특히 프로야구는 아마와는 달리 각종 기록이 쏟아져 종래와는 다른 해설을 가능케 해 해설의 전문화를 촉진케 했다.
올해로 출범 1l년째를 맞은 프로야구에서 TV및 라디오 해설자는 5백만 야구팬의 관심과 사탕을 독차지하는 인기인으로까지 변모했다. 근래의 해설은 경기의 상황을 설명해주는 차원에서 한단계 높아져 경기장에 나타나지 않은 양쪽 벤치의 머리싸움, 선수들의 심리상태, 다음에 이어질 플레이의 예상 등 분석적인 기능에 주력할 만큼 발전했다.
프로야구가 생겨 야구가 발전하듯 야구해설도 야구발전과 발맞추어 진일보한 것이다.

<연봉으로 계약>
지난82년 KBS·MBC 양대TV방송이 야구해설자들과 연봉계약을 체결, 본격적인 야구전문해설시대를 열었다. 프로야구의 인기와 함께 야구해설자의 인기도 치솟아 해설자는 늘 야구팬과 함께 울고 웃는 이웃이 되었다.
KBS-TV 야구해설자인 하일성씨(44) 는 가끔 우스갯소리로 『전국 어느 곳에서나 국회의원에 출마해도 당선될 수 있을 것』이라며 자신의 인기를 뽐낸다.
프로야구 해설 11년동안 하씨는 부산이건 광주건 어디에서나 야구팬들로부터 환호를 받는 유명인사가 됐다.
환일고등학교 체육선생 출신인 하씨가 야구해설로 전국적인 인기인이 된 것은 그의 말대로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일』이었다.
하씨는 지난78년 당시 동양방송(TBC)에 야구해설자로 전격 스카우트되면서 자신의 설계와는 판이한 인생길을 걷게 됐다.
경희대에서 야구선수로 활약하다 중도에 포기한 하씨는 당시만 해도 해설은 꿈도 꾸지 못했을 때라고 말한다.
그러나 하씨는 방송전문가들의 충고를 착실하게 지키며 해설자로 자리잡기 시작, 오늘날 5백만 야구팬을 울리고 웃기는 전문야구해설자가 됐다.
MBC-TV의 허귀연씨(42)는 하씨와 달리 82년 프로야구 출범과 함께 방송해설자로 변신한 케이스.
고려대→한일은행에서 2루수로 활약하다 금성계전 사원으로 근무하던 허씨는 MBC로부터 갑작스런 연락을 받고 단 한번 해설 마이크를 잡은 게 인연이 됐다고 한다.
허씨는 평소에도 사회를 보거나 청중앞에 나서 말하기를 좋아했던 터라 대부분의 사람들이 겪는 마이크공포증은 없었다고 한다.
당시 허씨는 게임당 출연료조로 3만5천원을 받았는데 이후 MBC측이 계속 해설을 요청하자 프로야구선수최고 연봉인 2천2백만원을 요구, 방송국측을 놀라게 했었다.
협상을 거쳐 연봉 1천만원에다 해외출장 때 출장보조금 4백만∼5백만원을 지급한다는 조건으로 정식 계약하게 됐다.
프로야구 전문해설자 1세대인 허구연씨와 하일성씨는 이후 선의의 라이벌 관계를 유지하며 각기 독특한 개성을 발휘했다
허씨는 실업야구에서 선수로 활약한 경험을 살려 경기의 상황을 세밀하게 분석하는 데 주력했다.
반면 하일성씨는 타고난 입담을 주무기로 선수들의 심리상태나 양쪽 덕아웃의 작전 등을 예상하는 등 구수한 해설에 중점을 두었다.
이들 두 해설자들은 아마야구시대의 선배해설자인 이호헌(62)·김동엽(53) 씨와의 차별화를 위해 남모르는 노력을 기울이기도 했다.

<미국용어 도입>
허구연씨는 일본 야구 용어가 판을 치던 당시 데드볼(사구) 대신 히트 바이 피치드 볼(Hit by Pitched Ball), 포볼 대신 베이스 온볼스(Base in Balls) 등 미국 본바닥 용어를 방송에 도입해, 야구인들과 야구팬에게 신선감을 주는데 성공했다.
허씨는 한 때 이들 용어를 사용하다 국내 야구인이나 팬들로부터 『영어를 분별없이 사용하는 사대주의적 발상』이라는 어이없는 질책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허씨 등 젊은 해설자들의 꾸준한 노력으로 오늘날에는 이들 원어(원어)가 정착 야구계에서 널리 쓰이고 있다
하씨와 허씨가 TV야구해설자로 자리잡아가자 프로야구 감독이나 코치출신의 지원자들이 너도나도 해설자로 선보이게된다.
재일동포출신 감독이던 김성근씨도 한 때 야구해설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야구해설도중 『파스토(1루수)가 반도(번트)실패때 빠꾸(백)해야 하는데…』라는 등 일본식 억양·발음을 그대로 사용하다 하루만에 부적격 판정을 받고 말았다. 그 대타로 등장한 사람이 바로 하일성씨다.
그래서 김씨는 지금도 하씨만 보면 『내가 키운 사람』이라며 농을 건다.
하씨의 데뷔도 순탄치만은 않았다 호랑이 체육선생으로 통하던 하씨는 라디오해설자로 데뷔했으나 내심 TV쪽에 마음을 두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전임 해설사인 김병우씨(제일은행감독) 가 급한 일로 나올 수 없게되자 대타로 다음날 TV해설을 맡게됐다
하씨가 이 사실을 교장선생님께 알리자 교장선생님은 마이크를 통해 전교생에게 『호랑이 체육선생이 TV에 나올 예정이니 모두 시청하자』고 광고했다.
생전 처음 꿈꾸던 TV출연을 앞두고 하씨는 애지중지 기르던 구레나룻 수염을 말끔히 깎았다. 또 밤잠을 설치며 멋진 해설을 위해 자료도 충분히 준비했다. 방송 30분을 앞두고 초조하게 경기시작을 기다리던 하씨는 청천벽력같은 소식을 들어야 했나. 사정상 못 올 것이라던 김동우씨가 나타난 것이다. 따라서 당연치 하씨는 라디오해설자로 돌아가야 했다. 하씨는 지금도 그 때 일을 잊지 못한다. 수천명의 제자들이 체육선생이 TV에 나오길 기다렸을 것을 생각하면 사기를 친 것 같은 느낌을 지울 수 없는 것이다
최고참 해설자인 이호헌씨는 강한 경상도 억양 때문에 많은 곤욕을 치렀다
특히 영·호남팀간의 대결대 이씨의 입장은 더욱 난감했다 두 팀중 어느 쪽의 전력이 뛰어나게 강한데도 함부로 우위여부를 코벤트할 수 없었던 것이다.
지난 89년 이씨는 전력상우 위인 삼성이 해태를 이길 것이라는 평을 한 적이 있다. 그날밤 그의 집으로 해태팬의 격렬한 항의가 빗발쳤다.

<존칭쓰다 무안>
삼미슈퍼스타스와 롯데·태평양 등에서 투수로 활약하던 임호균씨(37) 는 방송도중 「감독님」이란 존칭을 쓰다가 질책을 받곤 했다. 현역 감독들이 대부분 천씨의 은사여서 아무리 노력해도 「님」자가 붙여진다는 것이다.
이같은 어려움은 올해 처음 해설을 맡은 이길환씨(35) 의 경우도 마찬가지. 이씨도 처음에 「감독님」을 연발하다 아예 호칭을 부르지 않는 쪽을 택했다.
프로야구선수들은 선배야구인인 이들의 해설에 많은 관심을 기울인다.
프로야구선수는 인기를 먹고사는 직업이고 이들의 한마디 평에 따라 인기가 오르내려 신경쓰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
그러나 많은 선수들은 이들의 해설에 남모르는 고통을 겪고 있다고 토로하고 있다. 상황이 펼쳐지게 된 동기나 필연성은 모르거나 외면한 채 누구나 알 수 있는 결과만을 평한다고 불만이다.
한국프로야구가 11년이 지났듯 전문야구해설도 이제 11살박이가 됐다.
따라서 이제부터의 해설은 철학이 가미된 해설이어야 한다고 전문해설자들은 스스로 반성하고 있다.

<권오중기자>

<시대별로 본 활약상>허귀연씨 일본식용어 추방 새바람
한국에서 처음으로 야구해설을 한 사람은 대한야구협회 부회장까지 역임한 손희준씨(작고) 다.
일제시대 연회전문에서 야구·농구 등 만능스포츠맨으로 이름을 날린 계씨는 6·25후인 53년께부터 고교야구와 실업야구의 해설을 시작했다. 손씨는 형인 손효준씨가 일본프로야구에 한국인으로는 두번째로 입단할 정도로 형제야구인으로 이름이 높았다. 야구외에 폭넓은 상식과 경륜으로 「구수한 해설」을 펼쳐 아직도 올드팬들의 기억에 남아있다.
계씨의 영향으로 야구팬들이 해설에 맛을 느끼케 되자 방송국들은 다투어 해설자를 찾게된다. 60년대에 들어 한국야구는 고교·실업야구를 중심으로 활기를 띠게 된다. 65년야구협회 공식기록원이던 이호헌씨가 KBS야구해설을 담당하면서부터 야구해설에 기록이 첨가돼 한층 새로운 묘미를 제공하며 본격적인 야구해설이 뿌리내리게 됐다.
이씨의 뒤를 이어 동아방송에는 당시 한전감독이던 김계현씨(작고)가 마이크를 잡았고 동양방송(TBC)에는 명투수출신인 서동준씨가 질세라 해설자로 나섰다.
이후 MBC가 개국하면서 이호헌씨가 해설자로 스카우트돼가자 KBS는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대우인 월30만원에 아마 롯데감독이던 김동엽씨(현SBS해설위원)를 해설자로 영입했다.
당시 「빨간 장갑의 마술사」로 그라운드에서 선풍을 일으키던 김씨는 그 인기를 방송에 십분 활용, 해설자로서도 명성을 떨치게 됐다.
그러나 야구전문해설자의 시대가 본격적으로 열리게 된 것은 82년 프로야구가 출범하면서부터. 지난 82년 MBC-TV에 혜성같이 등장한 허귀연씨는 30대의 패기를 앞세워 그동안 일본식 야구용어에 물들어있던 야구팬들에게 본바닥인 미국야구용어를 그대로 소개, 충격과 논란을 일으켰다. 이밖에 KBS-TV에 자리를 굳힌 하일성씨와 투수출신 김소식씨 등이 속속 해설자로 나서 특유의 입담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이후 감독출신인 박영길·주옥상씨 등과 코치이던 이충순씨 등도 잠깐 해설쪽으로 외도를 했으나 곧 현장에 복귀했고 최근 들어 프로선수출신 해설자 1호인 임호균씨가 SBS라디오를 통해 선배들에게 도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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