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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가좌역 선로 붕괴 … 시공사·철도공사 늑장 대응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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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철도건설본부 응급복구반이 4일 서울 서대문구 가좌역 선로 지반 침하 사고 현장에서 중장비를 이용해 복구작업을 벌이고 있다. 사고는 3일 오후 5시14분 가좌역 근처에 있는 지하역사 공사현장 옹벽이 무너지면서 일어났다.강정현 기자

300여 명의 승객이 목숨을 잃거나 다칠 수도 있었다. 78명이 숨지고 176명이 다친 1993년 3월 구포역 열차 전복 사고를 떠올리게 하는 아찔한 사고였다.

3일 오후 5시14분 발생한 경의선 가좌역 선로 지반 붕괴 사고는 시공사와 철도공사의 어이없는 대응으로 대형 참사로 이어질 뻔했다. 시공사는 붕괴 조짐을 파악한 뒤 공사 장비와 인부를 철수시키면서도 철도 당국에 제때 연락하지 않았다. 철도공사는 시공사의 보고를 받고도 사고 발생 4분 전까지 열차를 통과시켰다.

특히 이번 사고는 지난달 25일 철도공사가 사고 인근 지역 선로 지반 침하를 경고하고 변형된 선로의 보수를 요구하는 공문을 작성, 한국철도시설공단에 보낸 것으로 확인돼 사실상 예견돼 온 것으로 드러났다.

서울 마포경찰서는 4일 김동진 가좌역장과 시공회사 관계자를 참고인 자격으로 소환해 조사를 벌이는 등 수사에 착수했다. 업무상 과실과 안전 조치 미이행 여부가 수사의 초점이다. 경찰 관계자는 "철기둥을 보강하는 연결강선이 끊어져 사고가 발생했다는 진술을 확보했다"며 "부실 설계 여부를 확인 중"이라고 밝혔다.

◆어이없는 늑장 대응=이날 붕괴 조짐이 감지된 것은 사고발생 34분 전인 오후 4시30분이었다.

쌍용건설 최세영 홍보팀장은 "지하역사 공사 도중에 위에서 흙이 떨어지고 이상한 소리가 연속해 들려와 인부들을 모두 지하 공사현장에서 나오도록 대피시켰다"고 말했다.

건설회사가 선로감시원(시공사가 고용한 인력)에게 이런 사실을 알린 것은 15분 뒤인 오후 4시45분이었다. 현장 상황을 전해 들은 선로감시원은 "조치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건설회사 측은 이 말을 듣고 지하역사 공사 현장 밖에서 대기 중이던 인부까지 철수시켰다.

철도공사 측에 이런 상황이 전해진 것은 오후 4시57분쯤이었다. 붕괴 조짐이 감지된 지 27분이나 지난 뒤였다.

하지만 비상 상황 접수 이후에도 열차 운행은 계속됐다. 문산에서 서울 방면으로 3대가 지나갔고, 서울에서 문산 쪽으로 1대가 지나갔다. 2대는 서울역으로 승객을 태우러 가는 빈 열차였지만 나머지 2대는 각각 150여 명의 승객을 태운 통근열차였다. 서울에서 문산으로 간 통근열차는 사고 발생 불과 7분 전에 사고 현장을 지나갔다.

◆책임 떠넘기기=철도공사 관계자는 "공사 인부를 피신시킬 정도의 비상 사태 발생 시 즉시 비상연락망으로 철도공사 측에 연락했어야 한다"며 "현장의 안이한 대응 탓에 자칫 대형 사고로 이어질 뻔했다"고 주장했다.

쌍용건설 측 관계자는 "30m 밑의 지하에서 일하는 인부를 안전한 곳으로 피신시키는 것이 먼저"라며 "선로감시원이 역장에게 붕괴 위험을 알렸지만 결국 붕괴된 이후에야 열차를 세우지 않았느냐"고 맞받았다.

시행사인 한국철도시설공단은 "우리는 공사가 원활하게 진행되도록 주변을 정리하는 등의 지원만 할 뿐 공사 감리는 현장에 있는 감리사가 대행한다"고 말했다.

◆9일 전 "다른 곳이 위험" 공문=철도공사가 공단에 보낸 공문에는 경의선 복선전철 제2공구 노반 신설 공사와 관련해 신촌~수색 구간에 지하수가 유출돼 미세한 흙이 쓸려 내려가면서 구멍이 생겼다고 적혀 있다. 이에 따라 노반이 내려앉아 선로가 변형됐다는 것이다. 공사 측은 "열차 안전 운행이 심하게 우려된다"며 사고 가능성도 제시했다.

공문에서 지적한 지점은 붕괴 사고 현장에서 180m 정도 떨어져 있는 곳이다. 따라서 철도공사와 시설공단, 시공사는 이미 이 지역에서 선로 지반이 침하될 위험을 감지하고 있었던 셈이다. 철도공사 관계자는 "공문을 보낸 이후 공단 측과 몇 차례 논의했지만 최종적으로 어떻게 처리됐는지는 아직 확인되지 않은 상태"라고 말했다.

김기찬.권호 기자 <wolsu@joongang.co.kr>
사진=강정현 기자 <cogit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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