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 대통령 연설과 기업모금/박준영 뉴욕특파원(취재일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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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큰 행사를 치르다보면 으레 말들이 많지만 이번 노태우대통령의 유엔방문도 그 예외가 아닌 것 같다.
노 대통령의 유엔방문행사 가운데 가장 이해할 수 없고 말이 만흔 것은 23일의 아시아 소사이어티에서의 연설이다.
우리 대통령이 아시아국가들의 이익을 대변하는 이 민간단체에서 우리의 입장을 알리는 것은 시비거리가 아니다.
그러나 문제는 대통령의 연설이 이 단체의 기금마련에 상품으로 이용되고 그 기금의 대부분을 한국의 미 진출기업들이 부담했다는 사실이다.
노 대통령의 연설이 있은 23일의 만찬에는 미국의 외교계·학계 등 1천1백여명이 참석했다.
그러나 이들 대부분은 한국대사관 등 우리 정부의 초청을 받아 참석한 사람들이다.
초청받은 사람들이 한 좌석에 5백∼1천달러의 티킷을 살 리는 만무하다.
이들이 티킷은 뉴욕진출 은행지점협의회가 테이블 10개(한 테이블에 10명)를 맡는 등 미 진출 한국기업들이 부담해 사주었다.
아시아 소사이어티는 노 대통령의 연설로 1백만달러의 기금을 마련했다.
결국 우리 대통령은 미국인들을 상대로 연결 한번 하기 위해 한국상사들에 봉노릇을 시킨 셈이다.
한국기업이 정치인이나 권력있는 사람의 봉노릇을 하는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고 다반사로 이루어지는 것이긴 하지만 외국인들이 관련된 행사에서까지 벌어진 이같은 행태는 많은 미국인들에게 이해하기 어려운 것으로 비쳐질 수 밖에 없다.
그들이 음식과 대통령연설을 즐겼겠지만 돈 한푼 안내고 1천달러짜리 만찬에 초대받는 배경을 모를리 없기 때문이다.
한국기업들의 봉노릇은 현지외교관이 대통령의 유엔방문 의미를 키우기 위해 아시아 소사이어티 연설을 추진하면서 이 단체의 기금마련요구를 수용함으로써 비롯됐다.
이 연설을 추진한 관리들은 대통령을 위해 기업들이 돈좀 내면 어떠냐는 태도를 보이고 있지만 테이블을 사라는 압력에 아직도 이런 풍토가 남아 있다는데 의아해하고,꼭 해야 한다면 새로 발족한 코리아 소사이어티에서 함으로써 경비를 줄이거나 이 단체에 기금마련기회를 제공했어야 했다는 현지 기업인들의 불평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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