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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을 뿌리고 무엇을 거두나/돈연(종교인 시평)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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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올해 주된 농사로 콩을 조금 심고 무를 더 많이 심었다. 마을 사람들과 충분히 협의했기 때문에 협동도 잘 되었다. 파종할 무렵,적당하게 비도 왔었다. 넓은 밭에 약 1백만개가 넘는 무 싹들이 푸르게 푸르게 피어오르고 쑥쑥 자랄때 마침 무값도 예년에 비해 껑충껑충 뛰어 오르고 있었다. 작년에 채소농사로 많은 손해를 보았던 우리 마을은 올 무농사가 잘 되어갈 조짐때문에 은근히 기뻐했다.
○농민 울리는 악덕성혼
그러나 호사다마,근처에서 가장 착실한 무농사로 소문났던 우리마을의 밭이란 밭의 무는 모조리 꽃이 피기 시작했다. 무는 꽃이 피면 뿌리의 성장이 중지되고 심이 박히고 바람이 들어 도저히 상품이 될 수 없다. 원인은 간단했다. 종묘사가 묵은 종자를 속여 판 것이다. 그들은 저온때문이라고 변명했지만 유독 그 종자를 사다 심은 농가의 무밭은 모두 꽃이 피었는데 다른 회사의 씨앗들은 피지 않고 깨끗했다.
같은 지역에 심은 무들이 그렇게 차이가 난 것이다. 악덕종묘사의 악덕상혼이 한 마을의 무농사를 무참히 짓밟아 버린 것이다. 우리들은 약 백만개의 무포기에서 피어오른 바다같은 무꽃을 보며 비참하게 한숨어야했다.
이것은 올해 우리 마을에 밀어닥친 하늘의 재난이 아닌 사람에 의한 재난이었다. 우리는 지금 준비중에 있다. 어떤 식으로든 그들은 적당한 값을 치러야 한다.
「닭모가지를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고 말했던 이 나라의 정치인이 있었다. 올해 농사가 망했을지라도 우리는 내년에 다시 씨앗을 뿌릴 것이다. 이 어김없는 진실속에 농업적 직업의식은 갈고 닦아진다.
○농촌이 산업화 디딤돌
우루과이라운드(UR)라는 국제질서의 변화가 불어닥칠 농촌은 지금 폭풍전야의 고요함처럼 엄청난 변화를 눈앞에 두고 있다. 어찌 농촌뿐이랴. 이 땅의 먼 조상부터 지금까지 이 나라가 도무지 국제질서의 틈바구니에 끼지 않은 날이 있고,해가 있던가. 낱낱 삶의 계층과 모습,그 어느 한 곳인들 휘둘리지 않음이 있던가. 하여 온전히 보전된 우리의 것,변하지 않은 전통의 관습이 무엇이던가. 그러나 섣불리 말하건대 우리는 희망이 있다. 새벽 고속도로나,도시의 이른 아침 깨어남을 보라. 어느 나라 시장이 그토록 아침 일찍부터 붐비고,어느 나라 고속도로가 그렇게 열심히 일하는 차들로 바삐 오가고 있는가. 새벽 골목길을 또박 또박 걷고 있는 어린 학생들을 볼때마다 이 나라는 아직 살아 숨쉬고 있음을 본다.
농업정책에 분노하면서도 씨 뿌리고 거두며 땅을 지키고 있는 농민이 16%나 된다. 노인의 농촌,영세화된 농촌의 이미지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있기에 우리는 우리의 공업정책의 자존심을 높일 수 있다. 농촌이 있기에 도시가,도시가 있기에 농촌이 서로 의지할 수 있다. 이것이야말로 불교에서 말하는 훌륭한 연기론적 세계관의 실재성이다.
한 마을의 일이 나라 전체의 흉허물이 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를 보면 열을 알 수 있는 것이 또한 사회현상이다. 아픔이 손 끝에서 가장 빠르게 전달되듯,농촌의 문제가 건전하게 제시되고 치유되는 방법은 이 나라의 모든 나아갈 길과 함께 심사숙고되어야 할 문제점이 틀림없다.
올해 우리들은 트럭을 하나 사서 무를 골라 싣고 직접 시장에 내다 팔아보았다. 생산자와 소비자를 연결하는 통로에는 구조적으로 모든 도시의 나쁜 유통질서가 가로막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정부나 종교단체의 정책이나 관심으로 그것의 벽을 허물기는 엄청나 보였다. 그러나 우리는 문제를 보았다. 이것은 어떤 것이 문제인지 전혀 모르는 상태보다는 사고의 실마리를 제공하는 앞쪽으로 성큼 한발 다가선 것이다. 내년 우리는 그 문제를 해결할 것이다.
○참담했던 올해 무 농사
우리마을이 해결한다면 앞마을도 뒷마을도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그 많은 구조의 연결고리중 하나를 풀어버리는 격이 되는 것이다. 산지에서 개당 1백원 또는 2백원짜리 무를 8백원 또는 1천원에 사먹어야 하는 도시인들과 우리는 좀더 가까워져야 한다. 이익은 생산자와 소비자가 합리적 수준에서 공유해야 한다. 참담한 92년의 무농사는 두고두고 우리들에게 귀중한 교훈을 주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우리가 무엇을 뿌리고 거두어야 할 것인가를 점점 더 명확히 깨닫게 될 것이다. 풍요로운 농촌을 위해.<정선 보현정사 스님>
◇필자 약력
▲43세 ▲동국대 역경원졸업 ▲경전읽기모임 주도 ▲주요 저서 『아함경』 『산사의 하루』 『순례자의 노래』(시집)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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