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춤거리는 「유럽통합」/이견 못좁혀 내년 가동 불투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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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불 투표후 각국 시각차이 표면화/영 “덴마크 비준까지 재검토” 주장
프랑스의 마스트리히트조약 비준으로 탈선위기를 벗어나는듯 하던 유럽통합 열차가 진로를 둘러싼 기관사들간의 이견으로 또 다시 주춤거리고 있다.
51.05%의 초라한 승리로 막을 내린 프랑스 국민투표는 그동안 통합열차를 이끌어온 기관사들과 그 안에 탄 승객들간에 존재하는 엄청난 시각차를 확인하는 계기가 됐다는게 유럽 지도자들의 공통된 인식이다.
그런만큼 앞으로의 통합논의는 과거와는 뭔가 달라져야 한다고 이들은 입을 모으고 있다. 그러나 뭐가 어떻게 달라져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기관사들마다 서로 견해가 다르다.
열차가 가는 방향 자체를 재검토 해야 한다는 주장이 있는가 하면 방향은 맞은데 운전방식에 문제가 있었다는 주장도 있다.
이로 인한 기관사들간의 갈등이 표면화 하면서 유럽통합 열차는 갈피를 못잡고 또 다시 심하게 흔들리고 있다.
유럽통합열차가 갈 방향은 이미 마스트리히트조약에 명시돼 있다. 프랑스 국민투표에서 이 조약이 가까스로 통과된 다음날인 21일 유럽공동체(EC) 수뇌회의 의장인 존 메이저 영국총리는 「유럽의 장래에 대한 심각한 재검토」를 역설하고 나섰다. 이와 함께 그는 덴마크의 비준 실패로 인한 문제가 해결될 때까지 영국은 마스트리히트조약 비준절차를 연기한다고 밝혔다. 유럽 통합열차에 급브레이크를 걸고 나온 셈이다.
영국기관사의 반란(?)으로 열차가 서버리는 사태를 막기 위해 22일 프랑수아 미테랑 프랑스 대통령과 헬무트 콜 독일총리가 22일 황급히 파리에서 만났다. 이번 국민투표에서 나타난 유럽통합에 대한 국민들의 불안과 불만을 수렴,유러크랫 중심의 중앙집권적 의사결정을 지양하고 각국의 특수한 입장을 충분히 존중하는 등 통합의 민주성 제고방안을 논의했다는 것이 측근들의 설명이다.
그동안 유럽통합 열차를 사실상 이끌어온 이 두사람이 긴급회동한 진의는 「마스트리히트조약에 재협상은 없다」는 한마디로 집약되고 있다. 열차의 운전방식은 바꿀 수 있지만 이미 정해진 방향은 바꿀 수 없다는 강력한 의지를 표명함으로써 유럽통화제도(EMS)의 위기와 프랑스 국민투표 이후 확산되고 있는 유럽통합에 대한 회의적 분위기의 진정을 노리고 있는 셈이다.
또 그동안 통합논의가 벽에 부닥쳤을 때마다 돌파구를 열어온 파리­본 축의 건재함을 대외적으로 과시하기 위한 의도도 큰 것으로 지적되고 있다.
메이저총리가 영국의 마스트리히트조약 비준을 덴마크 문제와 연계시킴에 따라 그동안 프랑스 국민투표에 가려 있던 덴마크 문제가 또 다시 유럽통합의 장래에 중요한 변수로 등장하게 됐다. 폴 슐뤼테르 덴마크 총리는 22일 내년 중반 국민투표를 재실시 할 계획이라고 발표했다. 마스트리히트조약은 서명국 모두 비준해야 발효될 수 있기 때문에 만일 덴마크에서 또 다시 부결될 경우 이 조약은 자동적으로 사장돼 메이저총리로서는 위험부담을 안고 비준안을 의회표결에 부칠 필요조차 없어지게 된다.
덴마크의 국민투표 재실시 시기가 내년으로 잡힘에 따라 마스트리히트조약의 비준을 금년말까지 완료,내년 1월1일 EC시장 단일화와 함께 발효시킨다는 EC정상들의 야심적인 당초 계획은 이미 무산돼 버렸다.
다음달 16일 런던에서 열리는 EC 특별정상회담에서는 유럽통합의 진로 및 이미 반쯤 고장나거나 다름 없는 EMS의 장래를 놓고 통합열차 기관사들간에 한바탕 논란이 벌어질 전망이다.<파리=배명복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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