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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ek&에세이] 6월의 숲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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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이 시작됐다. 진정 여름이다. 숲이건 도시건 유난히 잦은 비와 높은 기온으로, 나무는 사랑스러우니 싱그러우니 하는 수식어가 무색하리만치 쑥쑥 자라고 있다. 사람들은 성장의 계절을 맞아 싱싱한 숲 이야기를 들려 달라고 한다. 지쳐가는 삶 속에서 숲이 성장하는 힘을 느끼고 싶다고들 한다.

식물이 성장하는 데 필요한 기본적인 물질은 이산화탄소와 빛과 물이다. 이산화탄소는 계절과 무관하게 거의 부족함 없이 공급된다. 식물의 생리작용을 이끌고 성장에 직접적 에너지를 제공하는 빛은 봄부터 여름에 이르며 최고가 된다. 풍부한 여름 비 역시 더없는 성장 동력이다. 땅속으로 스며든 충분한 빗물은 흙 속 양분들을 끊임없이 지상으로 끌어올린다. 또한 물은 그 자체로 식물의 광합성에 꼭 필요한 원료물질이며, 식물이 몸을 탱탱하게 유지할 수 있도록 적절한 압력을 제공한다. 이렇게 여름이라는 계절과 맞물려 식물들은 생명력을 최고조로 발휘한다.

하지만 이것이 다가 아니다. 식물에는 꼭 필요한 필수 영양물질들이 있다. 탄소와 수소와 산소 이외에 질소.인산.칼륨 등 14가지 물질이 더 있어야 한다. 이 물질들은 토양의 물에 녹아 뿌리를 통해 흡수된다. 나무의 무성한 성장 뒤에는 공기 중의 이산화탄소 탱크와 마찬가지로 흙 속의 거대한 영양물질 조달처가 있는 셈이다.

숲의 필요 물질들은 새로 만들어지거나 외부로부터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숲 속에 이미 있던 것들을 재활용하는 방식으로 충당된다. 숲 바닥에 무성하게 쌓인 낙엽이나 떨어진 가지, 부러진 줄기, 죽은 채로 서 있는 나무, 동물의 사체. 이런 것들이 숲 바닥에 쌓여 거대한 물질 저장고를 이룬다. 쌓인 사체들은 무수한 숲의 생물들에 의해 잘리고 쪼개지고 뜯기면서 최종적으로 아주 미세한 물질로 분해된다. 다행히 여름은 성장을 위한 계절이자 물질을 쪼개는데 적당한 조건을 제공하는 계절이기도 하다. 풍부한 빗물은 죽은 조직을 부풀려 약간의 힘으로도 부서지게 만든다. 높은 온도는 곤충과 박테리아.곰팡이.버섯의 왕성한 활동을 지원한다. 여름은 성장의 속도만큼 분해 혹은 붕괴의 속도가 빠른 계절인 것이다.

이 분해의 과정에서 전체 숲의 30%에 달하는 생물이 얽혀 들어 서로의 성장을 챙긴다. 죽은 조직의 느슨한 틈을 타 딱정벌레는 목질에 구멍을 뚫고 알을 낳는다. 부화한 애벌레는 부서진 목질 조각을 갉아 먹으며 몸을 굳힌다. 새들은 이런 애벌레들을 챙겨 먹느라 정신이 없다. 구석구석에서는 온갖 버섯이 피어난다. 버섯을 먹기 위해 달팽이가 기어오르고 버섯벌레가 끼어든다. 비가 자주 오고 기온이 높아질수록, 그래서 사람들에게 더없이 불쾌지수가 높아지는 바로 그때, 숲 바닥의 생물들은 1년 중 최대 호황을 누린다. 그러고 보면 여름은 성장의 계절이 맞다. 나무만 성장하는 것이 아니라 온 생물들의 성장기인 것이다. 생물 사체를 게걸스레 먹어 치우며 성장하는 나무를 상상해 보라.

세력이 커진 이 분해 군단에는 살아 있는 나무도 공격 대상이다. 나무들은 자신을 지키기 위해 지독한 화학물질들을 뿜어내고 잎 속에 독한 물질들을 쌓아올린다. 그럼에도 그 무시한 기세에 희생당하는 나무나 가지들이 생겨난다. 희생자들은 다음 혹은 그 다음 해에 땅 위로 부러져 내리면서 소멸의 후보자가 된다. 거칠고 질겨지며 일견 저항에 성공한 듯 보이던 나뭇잎들도 결국 가을이면 땅에 떨어져 이 가공할 만한 분해자들에 철저히 맡겨진다. 결국 모든 성장의 바탕엔 소멸이라는 일종의 희생이 포함돼 있다. 결국 성장하는 양을 통해 소멸의 양을 가늠할 수 있음이다.

6월, 호국 선열들을 기리는 뜻 깊은 달이다. 오늘은 어제의 소멸로 밝아진 날이다. 미래세대는 현 세대의 희생 속에 자란다. 자연스레 돌아가는 숲은 우리가 관여할 여지가 없다. 사람들은 그 성장의 열매를 거두기만 하면 된다. 다만 성장기의 숲을 마주하며, 자신만을 챙기기에 급급한 '사람의 숲'에서 우리는 미래세대의 지속적이고 풍요로운 성장을 위해 무엇을 준비해야 할지, 그 지혜를 구해야 할 것이다.

차윤정 산림환경학 박사 ('숲의 생활사' '신갈나무 투쟁기' '나무의 죽음' 저자 ) foreco@cho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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