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 7가] 최희섭과 거짓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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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말에는 하얀 것과 빨간 게 있다고 합니다. 하얀 거짓말은 그저 웃고자 실없이 던지는 '흰소리'입니다. 하는 사람이나 받는 사람이나 그리 기분 나쁜 것은 아닙니다.

빨간 거짓말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남을 속이는 것입니다. 그야말로 '새빨간' 거짓말입니다. 이익이 결부돼 있어 나중에 당한 것을 알면 불쾌하기 짝이 없습니다. 사기(詐欺)가 대표적입니다 .

그런데 새로운 거짓말 하나를 추가해야 할 것 같습니다. 멀쩡하게 어처구니 없는 '청맹과니의 거짓말'입니다. 최근 8년간의 미국 생활을 접고 기아 타이거스와 계약한 최희섭이 그 과정에서 한 말이 딱 거기에 들어맞습니다.

최희섭은 지난 5일 LA 한인타운의 한 대형마트 개장 기념 팬 사인회에서 있은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기아 타이거스로 옮긴다는 소식을 듣고 무척 당황했습니다. 저도 모르는 사실이었거든요. 제가 메이저리그를 포기한 것처럼 보여질까 걱정이 돼 운동에 전념하기도 힘들었어요."

LA에 머물면서 타이거스 단장과 협상 중이란 사실이 언론에 익히 알려져 있었고 그 며칠 전엔 에이전트가 "마지막 결단만 남았다"고까지 했건만….

황당해 한 것은 오히려 타이거스 쪽이었습니다. 그 말을 전해들은 기아의 관계자는 "당황이라니요? 사실 우리가 더 황당합니다. 단장이 미국으로 가 두 차례 만난 일은 언론에도 공개됐는데 지금까지 협상 과정을 선수가 철저히 모른다고 하니 정말 황당하기만 하네요?"라며 불쾌감을 감추지 못했습니다.

더더욱 황당한 일은 나흘도 안돼 벌어집니다. 최희섭이 마침내 계약금 8억원 등을 포함해 총 15억5천만원에 타이거스 입단 계약을 발표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최희섭이 계약 발표를 불과 며칠 안남겨놓고 한 말은 웃자고 한 흰소리였던가요? 아니면 새빨간 거짓말이었던가요?

전자였다면 언론을 희롱한 것이어서 성립이 안되고 후자였다면 사기를 친 것인데 불과 며칠도 못가는 거짓말은 사기꾼의 초보 중의 초보도 안하지요.

결국 최희섭의 말은 흰색도 아니고 빨간색도 아닌 청맹과니의 거짓말이라고 할 도리밖에 없습니다. 멀쩡하게 눈이 달려 있지만 정작 아무 것도 못보는 청맹과니. 곧 자기만 알고 남들은 다 모를 것이라고 내뱉은 어처구니 없는 말이었던 것입니다.

자기만 알고 남들은 다 모를 거라고 생각하고 행동하는 사람을 뭐라고 부릅니까. 그래서 최희섭의 말은 'XX 거짓말'이라고 해도 됩니다.

세상에는 청맹과니의 거짓말을 일삼는 XX들이 널려 있습니다. 스포츠계에서도 물론입니다. 오죽했으면 최근 ESPN이 메이저리그의 '거짓말 특선'을 따로 뽑았겠습니까. 거짓말의 말로는 그렇게 망신스럽고 비참합니다.

고국의 벌판에서 마음껏 뒹굴 최희섭에게 노파심에서 한마디 덧붙인다면 실전에 들어가서 행여나 청맹과니의 거짓말을 하는 것과 같은 자세는 버리라는 것입니다.

한국의 많은 투수들이 그를 잘 알고 있습니다. 반면 그가 알고 있는 투수들은 없습니다. 있더라도 이미 많이 변해 있을 것입니다. 메이저리그의 물을 먹었다고는 하나 아직 청맹과니는 그이지 한국 투수들이 아닙니다. 그래야 "이승엽의 홈런 기록을 깨겠다"는 그의 귀향 일성도 결코 흰소리로 끝나지 않을 것입니다.

구자겸 USA중앙 스포츠 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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