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문열 "독재적 반장 방치한 담임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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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하버드대에서 연수 중인 소설가 이문열씨가 29일(현지시간) 뉴저지주 사립학교인 페닝턴 스쿨에서 자신의 소설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을 주제로 11학년(고교 2학년) 학생들과 토론하고 있다. [뉴욕=연합뉴스]

"1987년 한국 상황에 비판적이었다면 왜 직접 반대하지 않고 대신 소설을 썼습니까?"

"그것은… 소설이 더 효과적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29일 오전(현지시간) 미국 뉴저지주 프린스턴 근교 페닝턴 스쿨의 한 강의실. 다른 민족의 문화에 많은 수업시간을 할애하는 이 학교 학생들과 토론하던 소설가 이문열씨는 뜻밖의 날카로운 질문이 날아오자 답변할 말을 고르느라 한참씩 뜸을 들여야 했다.

이 자리는 1월부터 '동아시아 문학' 수업을 들으면서 이씨의 소설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영문 제목 Our Twisted Hero)' 영문판을 교재로 사용해온 11학년생(고교 2학년) 학생들이 작가와 대화할 수 있도록 학교 측에서 마련한 특강이었다. 이씨가 가까운 보스턴의 하버드대에서 연수 중이란 사실을 전해 들은 담당 교사가 그를 초청해 마련됐다. 강의실에는 학생 20여 명과 교사 10여 명이 참석해 이씨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첫 질문은 "작품 아이디어를 어디서 구했는가"였다. 이씨는 "87년 당시 (대통령 간선제 유지를 골자로 한) 4.13 호헌 조치가 내려지자 많은 지식인이 당황했지만 일단 현실에 순응했다"며 "이게 작품의 소재였으며, 이를 통해 한국 사회의 모순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왜 하필 초등학교 교실을 무대로 썼느냐"는 질문에 이씨는 "복잡한 80년대 한국의 시대상황을 단순화하기 위해 그렇게 했다"고 답했다.

토론이 이어지면서 등장인물들의 독특한 캐릭터에 대한 질문도 쏟아졌다. 한 학생은 "독재적이던 반장 엄석대는 누구를 상징하느냐"며 궁금해 했다. 이씨는 "당시의 한국 대통령을 빗대 표현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그는 "그렇다면 독재적이던 반장을 방치했던 첫 담임은 누구를 상징한 것인가"라고 학생들에게 되물었다. 그러자 학생들 사이에서 즉각 "미국 아니냐"라는 답변이 튀어나왔다. 이씨는 "맞다"면서 "이익이 되면 독재자든 누구든 아랑곳하지 않던 미국의 행태를 은유한 것"이라고 덧붙였다.

말미엔 "소설을 다시 쓴다면 어떻게 고치겠느냐"는 물음도 나왔다. 이씨는 "과거 내가 쓴 소설의 경우 결말을 한물간 권선징악(勸善懲惡)으로 마무리한 게 좀 있어 이를 좀 더 세련되게 고쳐 보라는 얘기를 들었으나 결말은 그대로 두겠다"며 "다만 후속 작품을 쓴다면 좀 더 낙관적으로 만들어 보겠다"고 답했다. 이어 "원래 성인을 대상으로 쓴 작품인데 요즘은 초등학교 교과서에 이 글이 실린다고 해서 온당하지 않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고 덧붙였다.

이날 한 시간여 토론회를 끝낸 이씨는 "문화적 배경이 달라 미국 학생들이 내 작품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할 것으로 생각했는데 소설의 원관념을 정확히 꿰뚫고 있어 놀랐다"고 털어놨다.

학생들은 원작자와 대화를 나눴다는 사실에 감격했다. 앞줄에 앉아 경청한 그레시아 리베라는 "책을 읽으면서 궁금했던 내용을 작가로부터 직접 들을 수 있어 아주 기뻤다"며 즐거워했다.

뉴욕=남정호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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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現] 부악문원 대표

194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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