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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심 오피스 빌딩 씨가 마른다

중앙일보

입력

이코노미스트 막대한 자금력을 갖춘 외국 자본이 서울, 경기 등 주요 도심의 알짜 오피스 빌딩을 싹쓸이하고 있다. 특히 이들 외국 자본은 매물로 나온 오피스 빌딩뿐 아니라 개발이 진행 중이거나 개발 예정인 곳까지 공격적인 투자에 나서는 등 엄청난 식욕을 과시하고 있다. 국내 실수요자나 부동산펀드들 사이에서는 “이러다간 씨가 마르겠다”는 하소연마저 나오고 있는 실정이다.


“또 돈에 밀렸다.”

지난 5월 15일 서울 상암동 디지털미디어시티 내 2만 평 규모의 팬택 신사옥 공개입찰 결과가 발표되자 국내 금융권 곳곳에서는 이 같은 푸념이 흘러나왔다. 이 공개입찰에서 ING그룹은 미래에셋맵스자산운용·하나은행·LG 등 국내 기업 및 금융권 컨소시엄들을 제치고 최종 입찰자로 선정됐다. 매매가격은 평당 1000만원으로 총 2000억원. 이는 평당 850만~900만원의 입찰가격을 제시한 국내 자본보다 무려 10% 이상 높은 수준이다.

팬택 신사옥은 입지조건이 좋아 향후 높은 매매차익이 예상되는 데다 최근 부도 위기를 면한 팬택이 임차인으로 확보된 상태여서 알짜 중 알짜로 평가받는 매물이었다. 공개입찰 초기 국내외 자본 10여 곳이 치열한 경쟁을 벌인 것도 이 때문. 하지만 입찰 경쟁이 심해지면서 가격이 뛰자 국내 자본들은 하나 둘 떨어져나가기 시작했다.

도심 오피스 빌딩 집중 사냥

팬택 신사옥 공개입찰에 참여한 금융기관 고위 관계자는 “평당 800만원 내외가 적당하다고 생각했지만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가격이 껑충 뛰었다”며 “부담스러운 수준까지 가격이 오르자 일부 국내 자본은 경쟁을 포기하기도 했다”고 전했다.

외국 자본의 머니 게임에서 밀린 사례는 팬택 신사옥뿐만이 아니다. 지난해부터 입지가 좋고, 임대 수요가 많은 도심의 알짜 오피스 빌딩의 경우 잇따라 외국 자본에 넘어간 것으로 나타났다. <표 참조>

다국적 부동산컨설팅 회사인 CBRE 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거래된 서울 지역의 11개 A~B급 오피스 빌딩 중 6개가 외국 자본에 팔렸다. A~B급 오피스 빌딩이란 규모가 기준치(연면적 1만 평, 높이 15층) 이상이면서 접근성, 편의성 등을 고루 갖춘 알짜 매물을 말한다. 외국 자본이 이들 알짜 오피스 빌딩에 투자한 자금만 3822억원에 달한다.

외국자본의 오피스 빌딩 사냥은 올해에도 이어지고 있다. 지난 3월 매물로 나온 여의도 대우증권 빌딩과 동양종금증권 빌딩은 국내외 자본 간 치열한 경합 끝에 도이치은행그룹 계열사인 DBREi(Deuts-che Bank Real Estate investors)에 넘어갔다. 매입 가격은 대우증권 빌딩 1120억원, 동양종금증권 빌딩 1427억원.

이들 빌딩은 2004년 맥쿼리가 골드먼삭스(대우증권 빌딩 720억원)와 론스타(동양종금증권 빌딩 850억원)로부터 1570억원에 사들인 것이다. 이번 빌딩 매각으로 맥쿼리는 투자 3년 만에 850억원가량의 매매차익을 챙겼고, 그동안 임대수익까지 합하면 1000억원가량의 수익을 올린 것으로 추산된다.

외국자본의 공습은 매물로 나온 오피스 빌딩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현재 건설이 진행 중이거나 진행될 예정인 오피스 빌딩까지 손을 뻗치고 있다. 입도선매까지 서슴지 않고 있는 것이다.

그 대표적인 예가 시행사 글로스타가 건설 중인 을지로 2가 청계구역의 36층 주상복합아파트다. 총 9000억원 규모인 이 주상복합아파트에는 미래에셋과 함께 메릴린치가 지분의 50%를 투자하기로 결정한 상태다.
서울 여의도 중소기업전시장 부지에 개발 중인 55층짜리 국제금융센터도 AIG가 주요 금융사(파이낸싱 파트너)로 참여하고 있다. 국제금융센터는 연면적 15만 평, 공사비 1조4000억원 규모의 매머드급 오피스 빌딩이다.

또 중소기업전시장 맞은편 통일주차장에 지어지고 있는 오피스 빌딩들도 모건스탠리 등 외국계 부동산펀드들이 주요 금융사로 이름을 올린 상태다. 시중은행의 한 부동산투자 담당자는 “돈이 될 만한 알짜 매물은 어김없이 외국 자본이 참여하고 있다”며 “공개입찰일 경우에는 국내 자본은 명함도 내밀기 힘든 상태”라고 전했다.

외국 자본이 국내 오피스 시장에 공격적으로 투자하는 이유는 그만큼 돈이 되기 때문이다. 정부의 억제정책으로 주거용 부동산 시장은 침체기에 있지만 오피스 시장은 공급 부족으로 투자수익률이 여전히 높다는 것이 부동산 전문가들의 설명이다.

김형석 미래에셋맵스자산운용 상무는 “서울 여의도, 강남, 시청 주변 등 주요 도심의 공실률은 1% 내외로 전 세계적으로 봐도 매우 낮은 상태”라며 “더욱이 수요는 꾸준히 늘고 있지만 공급은 달리고 있어 임대수익과 매매차익 등 투자수익률도 높게 유지되고 있다”고 말했다.

막대한 자금력으로 공습

국내 자본이 돈이 될 만한 오피스 빌딩 공개입찰에서 번번이 외국 자본에 밀리는 이유는 바로 자금력 때문이다. 국내 자금조달 금리는 통상 5~6%가량인 반면 미국, 유럽 등지의 외국 자본은 자국에서 2~3% 안팎의 낮은 금리로 자금을 빌려와 투자에 나서고 있는 실정이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가격경쟁이 붙으면 국내 자본은 힘도 못 쓰고 포기할 수밖에 없는 형편이다.

강현수 KTB자산운용 과장은 “애초에 자금조달 금리 차이가 나기 때문에 기대수익률이 같아도 투자 여력은 다를 수밖에 없다”며 “국내 자본의 경우 비용 대비 수익을 생각해야 하기 때문에 가격경쟁으로 갈 경우 불리해진다”고 말했다.

최근 외국 자본의 주도 세력이 바뀐 것도 경쟁을 어렵게 하고 있다. IMF 직후에는 골드먼삭스, 모건스탠리 등 고위험 고수익 사모펀드들이 시장을 주도했지만 최근에는 유럽, 호주 등지의 연기금과 보험 등 저위험 저수익 장기투자 자금이 대세를 이루고 있다. 이들 장기투자 자금은 길게 보고 투자할 뿐 아니라 기대수익률도 낮아 어느 정도 수익성이 있다 싶으면 막대한 자금을 쏟아 붓는 것이 특징이다.

백동흠 미래에셋증권 부동산금융팀 과장은 “IMF 직후에는 골드먼삭스, 모건스탠리 등 하이리스크 하이리턴 성격의 사모펀드들이 오피스 시장을 주름잡았지만 최근 들어서는 유럽, 호주 등지의 장기투자 자금이 더욱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다”며 “이들 장기투자 자금은 기대수익률이 낮기 때문에 안정적인 국내 오피스 시장에 막대한 자금을 투자하고 있다”고 전했다.

외국 자본이 국내 오피스 시장을 주도하면서 국내 금융기관들은 부동산 투자 상품개발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올 들어 임대형 부동산펀드(오피스 빌딩에 투자해 임대수익을 투자자에게 배분하는 펀드)가 하나도 출시되지 못한 것도 외국 자본의 독주 영향이 크다는 지적이다. 김대일 SH자산운용 이사는 “매물도 흔치 않는 데다 그마저 외국 자본이 시장을 주도하면서 펀드가 설 자리가 별로 없는 것이 현실”이라고 하소연했다.

이에 따라 국내 금융기관들은 외국 자본과 대등 경쟁을 위해 부동산간접투자 규제를 대폭 완화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현재 국내 부동산펀드나 리츠는 순자산의 2배만큼만 대출이 가능하다. 예를 들어 순자산이 100억원인 펀드는 200억원까지만 대출이 가능한 셈이다. 따라서 수천억원대의 대규모 알짜 매물이 나와도 선뜻 나설 수 없는 상황이다. 미국 등 선진국에서는 이 같은 규제가 아예 없다.

김형석 상무는 “국내 자본은 자금조달뿐만 아니라 규제 측면에서도 외국 자본과 경쟁이 되지 못한다”며 “국내 부동산 간접투자 활성화를 위해서라도 하루빨리 규제를 풀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임상연 기자[sylim@joongang.co.kr]

<이코노미스트 89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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