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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일의 인사이드 피치] 136. 전설의 '야구 산타' 클레멘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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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설의 야구왕 베이브 루스를 다룬 영상 기록물을 보면 그가 병원을 찾아 환자들을 위문하는 장면이 심심치 않게 나온다. 그때 떠올리게 되는 것이 바로 산타클로스다. 넉넉한 체격에 서글서글한 인상의 베이브 루스는 산타클로스로 대입시키기에 가장 적합한 야구선수 가운데 한명이 아닌가 싶다. 베이브 루스가 활약하던 시절이 1920~30년대. 그때부터 스타 플레이어들의 봉사와 기부는 사회를 밝고 희망차게 만드는 데 한몫했다.

겉모습은 베이브 루스가 많이 닮았지만 실제로 산타클로스에 가장 가까이 갔던 메이저리거는 니카라과 출신으로 60~70년대 피츠버그 파이어리츠에서 활약했던 로베르토 클레멘테라고 할 수 있다. 우아한 타격과 환상적인 수비, 강한 어깨를 지녔던 클레멘테는 야구장 밖에서도 모범을 보인 스타였다. 클레멘테는 72년 9월 30일 자신의 통산 3천번째 안타를 때렸다. 더도 덜도 없는 3000. 그게 클레멘테의 마지막 안타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다.

클레멘테는 3천 안타를 때린 두달 뒤, 72년 11월 23일 고국 니카라과에 대지진이 일어났다는 비보를 접했다. 그리고 그해 12월 30일, 클레멘테는 고국에 갖다 줄 구호품을 가득 싣고 비행기를 탔다가 다시는 땅을 밟지 못했다. 비행기는 니카라과에 도착하지도 못하고 추락했고, 클레멘테는 모든 중남미 선수들의 영웅으로 가슴에 남은 채 공중에서 산화했다.

메이저리그는 74년부터 사회 봉사에 헌신적인 선수를 선정해 그의 이름을 딴 '클레멘테상'을 수여하고 있다. 올해는 시애틀 매리너스의 왼손 투수 제이미 모이어가 이 상을 받았다. 모이어는 올해 프레드 허친슨 암센터와 공동으로 암 퇴치 연구를 위한 25만달러의 기금을 조성하는 등 2000년부터 시애틀 지역사회를 위해 많은 노력을 해 왔다.

국내 프로야구에도 '한국판 클레멘테'들이 늘어나고 있다. 좋은 일이다. 올해 프로야구 선수협의회가 집계한 프로야구 선수들의 성금은 2억1천1백76만8천6백60원. 이는 공식적으로 집계된 금액이고 발표되지 않은 성금을 합치면 더 많다는 게 선수협의 주장이다. 한국야구위원회(KBO)가 집계한 2003년 8개 구단의 성금은 4천4백80만원이다. 서재응.최희섭.봉중근 등 미국에서 활약하고 있는 선수들도 고국 방문 기간에 그늘진 곳을 찾아 따뜻한 사랑의 봉사활동을 벌이고 있다.

성금의 종류도 '불우이웃 돕기' '수재의연금' 등에서 벗어나 다양한 형태로 확대되고 있다. 올해 불우이웃 돕기 성금만 8백50만원을 기증한 현대 정민태는 자신과 인연을 맺은 소녀가장에게 매년 3백만원을 지원하고 있다. 또 수재의연금으로 1천만원을 낸 기아 이종범은 '청소년 왕따날리기' 대사로 기금 모금에 앞장서고 있다. 심정수 등 6명의 현대 선수들은 5월 27일 수원 지역의 선천성 안면장애 아동과 혼자 사는 불우 노인 40명에게 백내장 수술을 주선해 주기도 했다. 이런 산타클로스들이 계속 늘어나기를 바란다. 야구 실력만큼 그들의 가슴도 점점 따뜻해지길 바란다. 그래서 언젠가는 국내에도 클레멘테상이 만들어지길 바란다.

이태일 야구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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