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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이란 27년 만에 대사급 회담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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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6면

핵 문제로 팽팽하게 대치하고 있는 미국과 이란이 27년 만에 고위급 공식회담을 이라크 수도 바그다드에서 열었다. 양국이 직접 대화한 것은 이란에서 이슬람 혁명이 발생한 다음 해인 1980년 테헤란 주재 미국 대사관 점거사건으로 외교관계가 단절된 이후 처음이다.

바그다드의 미군 특별 경계구역인 그린존에서 28일 열린 양국 고위급회담에는 이라크 주재 라이언 크로커 미국 대사와, 하산 카제미 이란 대사가 양국 대표로 나왔다. 이라크에선 누리 알말리키 총리가 회의 직전 양측 대표들에게 연설했으며, 국가안보자문 모와파크 알루바이에가 대표로 회의에 참석했다.

회담 직후 양측은 "회담 분위기가 긍정적이고 실무적이었다"고 밝혔다. 그러나 비공개로 4시간 동안 진행된 이번 만남에서 양쪽의 입장 차이는 분명했다.

협의 내용은 주로 이라크 문제에 한정했다. 이란 핵 문제와 이란의 미국 국적자 억류사건 등 껄끄러운 다른 의제를 일부러 피한 것이다.

미국은 이란의 긍정적인 역할을 요청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라크 내 폭력사태의 배후 역할을 중단하라는 것이다.

크로커 주 이라크 미 대사는 "이란의 이라크 테러조직 지원에 대한 직접적이고 특별한 미국의 우려를 수차례 전달했다"고 강조했다.

반면 이란은 미국이 이라크 불안정의 책임을 이란 등 주변국에 전가하기보다는 조속한 철군으로 이라크 사태를 마무리할 것을 당부한 것으로 알려졌다. 양측 주장이 평행선을 그었다는 뜻이다.

알말리키 총리는 회담 직전 양측 대표에게 "이라크는 외국의 군대 주둔이나 간섭 없는 안정된 나라가 되기를 원한다"며 "이라크는 테러세력의 기지가 되어선 안 되며, 이라크 주둔 미군의 역할은 이라크군과 경찰의 재건을 돕는 수준에서 그쳐야지 이웃 나라를 공격해선 안 된다"고 말했다.

이번 회담은 이란이 26일 자국에서 활동하는 미국 등 서방의 간첩망을 체포했다고 발표해 외교적 긴장이 높아진 가운데 열렸다.

회담은 전체적으로 성과 없이 끝났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오랫동안 대화하지 않았던 양국이 대화의 물꼬를 텄다는 긍정적 평가도 나온다.

크로커 미 대사는 회담을 마친 뒤 "이란이 추가회담을 제안했다"며 "미국은 언제 이를 받아들일지 검토할 것"이라고 말했다.

탐색전으로 끝난 이번 대화가 앞으로 이란 핵 문제, 중동 지역 안정화를 둘러싼 양국 간 대화와 타협의 시발점이 될 수도 있다는 조심스러운 전망도 나오고 있다.

카이로=서정민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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