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92)제88화 형장의 빛(27)운보 김기창 화백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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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청각과 언어장애를 딛고 60여년 동안 예술에 생을바친 운보 김기창 화백은 독실한 기독교인이다.
8세 때 장티푸스 고열로 인해 청각을 잃은 운보 선생이 자신의 불행을 이기고 운명의 승리자가 된 데에는 끊임없는 인간의지를 불어넣어 준 아내 고 우향 박협현씨(76년 타계)의 사랑의 힘도 컸지만 운보 자신이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몸소 사랑을 실천한데 힘입은 바도 크다.
운보 선생과 내가 인연을 갖게 된 것은 86년 봄 전국교도소 재소자 정서순화를 위해 교도소에 그림 부쳐주기 운동을 펴오던 나의 뜻에 운보 선생이 적극 찬동하여 청송 보호감호 소에 전지 작품『비파도』한 점을 내놓게 되어 인연을 맺게 되었다.
86년4월 나와함께 청송 감호소까지 내려가 그림 기증 식을 갖기도 한 운보 선생은 그곳 재소자들을 위해 떠듬떠듬 어눌한 말투로 강연을 했다. 재소자는 물론 모두들 숙연해졌다.
『나는 벙어리입니다. 귀도멀고 말도 잘 못합니다. 그런 장애인인 내가 왜 이곳에 왔겠습니까. 나는 몸은 불구지만 정신은 건강합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몸은 건강하지만 정신이 불구입니다. 진짜 장애인은 생각을 건전하게 하지 못한 채 사회를 어지럽히는 사람입니다』 라고 꾸짖은 후『그러나 사람이 살면서 한때 실수가 없을 수 있겠느냐』면서 새 삶의 자세를 강조했다.
강론을 마치고 운보 선생은 갑자기 농아 재소자 사동에 가보고 싶다고 했다. 그곳에서 한 농아 재소자를 끌어안고 많은 얘기를 했다. 어린 시절『벙어리』라고 친구들이 마구 놀려대 외로웠던 얘기와 아버지는 목수가 되라고 했지만 어머니가 평소 그의 그림 그리는 솜씨를 보고 어려운 살림 속에서도 그림도구를 사다준 얘기도 했다.
배고픈 삶 속에서도 그림 그리는 것 자체가 좋아 그저 열심히 한눈팔지 않고 그림 그리다 보니 오늘에 이르렀다면서 노력만 하면 아무리 어려운 일도 해낼 수 있다며 그 재소자의 등을 두드려주었다. 출소하면 꼭 취직시켜 주겠다고 약속했다.
그 후 운보 선생은 86년11월 의정부교도소에 반 절지 한국화『석류』를, 그리고 영등포교도소에도 다른 한국화 작품을 기증했다. 특히87년 1월에는 안양교도소 농아재소자 13명에게 내복 등을 선물하고 새사람이 될 것을 당부했다. 이날 운보 선생이 만난 13명의 농아 재소자들은 정부가 실시한 미장등 기능사자격시험에 합격한 모범 재소자들이었다. 농아재소자들이 기능사 시험에 합격한 것은 건국 이후 처음 있는 일이어서 그 날 정경은 더욱 흐뭇했다.
87년 2월에는 나와 함께 제주도에까지 내려가 수의를 입은 6명의 농아자·실명자·소아마비지체장애인 앞에서 한때의 실수를 꾸짖거나 위로하면서 인생살이 얘기를 나누었다. 귀 멀고 말을 잘 못하는 선배 장애인이 자신이 걸어온 길을 털어놓을 때 6명의 장애인 재소자들은 참회하는 모습이 얼굴에 역력했다.
운보선생은 이 사회가 농아 자들을 따뜻하게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에 농아 자 범법자들이 늘게 된다면서 구들을 위해 사회 전체가 애정과 관심을 지속적으로 가져야 할 것이라고 강조한다.
그는 장애인들의 자립을 위해 청주에 대규모 도예공장「운보의 집」을 건립해 운영하고 있다. 사랑의 실천에 몸소 발벗고 나서 모든 이 땅의 장애인들에게 본보기가 되고 용기를 불어 넣어주는 그의 행동을 보면서 육체적 장애보다 언제까지나 살아있을 정신이 병들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느낀다.
운보선생과 나는 신앙은 다르지만 진정한 사랑을 베푸는 그의 실천정신에서 내가 받는 감동과 깨달음은 이렇듯 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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