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책갈피] 삶이 비루해도 살아낼 거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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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나, 제왕의 생애 쑤퉁 지음, 문현선 옮김, 아고라, 360쪽, 9800원

소년은 "빌어먹을 개 방귀만도 못한 왕"이었다. "하늘 아래 가장 유약하고 무능하며 가장 가련한 제왕"이기도 했다. 열네 살의 나이로, 장자도 아니면서 수많은 이복형제들의 질시 어린 시선을 뒤로 한 채 왕위를 계승한다. 그러나 실상은 권력을 손에 넣으려는 할머니가 꾸민 인형극의 꼭두각시에 지나지 않았다.

숨막히는 궁중 생활, 운 좋게 사랑하는 소녀를 만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행복도 길지 않다. 소녀는 후궁이 된 지 6년 만에 궁중 여인네들의 계략에 말려 "흰 여우 새끼를 낳았다"는 누명을 쓰고 쫓겨나간다. 왕에게는 선왕 후궁들의 혀를 자르고 할머니의 국화밭을 짓밟는 위악적인 일상만 남는다.

중국의 가상왕국 섭국을 무대로 한 이 소설은 소년제왕 단백의 일인칭 시점으로 진행된다. 하지만 단백의 뒤에서 "인생이 덧없다고? 그렇게 흘러가는 게 인생"이라 말하는 작가 쑤퉁(蘇童.44)의 목소리를 느끼기란 어렵지 않다. 영화 '홍등'의 원작('처첩성군')을 쓰기도 한 쑤퉁에 따르면 인생은 달콤함과 씁쓸함이 뒤섞인 역설의 연속이자, 끝끝내 불가해한 무엇이다.

"완벽하게 아름다운 인생이란 불과 물, 독과 꿀처럼 서로 어울리지 못하는 것들이 한데 어우러진 무엇이다.(…) 이 소설에 나오는 이야기는 비오는 밤에 놀라 깨어났을 때의 꿈결 같은 것이다."(작가 서문)

따라서 인생을 이해하려는 노력은 부질없다. 삶은 비루하지만 우리는 주어진 삶을 살아내야 한다. 쑤퉁은 음모와 잔혹함으로 가득한 이 가상소설을 통해 특유의 '인생론'을 펼친다.

제왕이지만 할머니의 손바닥 위에서 놀아나는 원숭이에 불과했던 단백. 그가 폐서인 후 늘 소원해 마지않던 광대가 돼 '줄타기의 왕'으로 훨훨 나는 장면은 역설의 극치다. "볼이 하얗고 통통하던" 애첩 혜선을 사창가 여인으로, 다시 시장바닥 장사치로 재회하는 장면은 어떤가. 왕이 몰락해도 여전히 왕의 충실한 내시일 수밖에 없는 연랑의 운명은 연민을 넘어 비애마저 느끼게 한다. 도대체 인생은 무슨 '웃기는 짬뽕'일까.

소설의 마지막에 이르러 단백은 아무도 모르는 깊은 산 속으로 들어간다. 낮에는 줄을 타고 밤에는 '논어'를 읽는다. "나는 어떤 날은 이 성현의 책이 세상만물을 모두 끌어 안고 있다고 느꼈고, 또 어떤 날은 거기에서 아무 것도 얻을 수 없다고 느꼈다." 인생은 그런 것이다.

영화 '마지막 황제'를 보면 마지막 황제 푸이가 기차역 화장실에서 손목을 그어 자살기도를 하는 장면이 나온다. 더이상 비루한 삶을 견딜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단백은 한 번도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 하지 않는다. 그는 인생의 유장한 흐름 앞에 자신을 내맡기는 인간이다. 단백의 생을 '완벽하고 아름다운' 것으로 느껴지게 하는 건 그의, 쑤퉁의 이러한 인생관 때문일 것이다. 소설이 영상예술보다 훨씬 더 공감각적으로 탁월한 경우를 가끔 만난다. 이 소설이야말로 그렇다.

기선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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