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 추리·과학소설 붐 본격문학소설 안 읽힌다|재미와 지식 묶어 요즘 독자취향부합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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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3면

외국 번역소설이 붐을 이루는 속에 국내 본격소설이 맥을 놓고 있다.
아이자크 아시모프의『파운데이션』.마이클 크라이튼의『주라기 공원』, 토머스 해리스의『양들의 침묵』으로 대표되는 미국의 추리소설·과학소설들이 황금알을 낳는 거위로 둔갑하는 동안 국내 문단은 『소설 토정비결』·『소설 목민심서』등 역사인물 이야기들이 유행을 이루고 있을 뿐 폭넓은 공감대를 형성한 본격 소설을 내놓지 못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문학의 주변 부 신세를 면치 못했던 추리소설·과학소설이 어느 날 갑자기 국내 독자들을 사로잡으면서 문학의 중심으로 떠오른 것이다.
최근 이들 소설의 특징은 무엇이며 왜 이 같은 소설들이 잘 팔리는지, 추리소설·과학소설이 문학의 중심부로 부상한 사회적 의미는 무엇인지를 살펴본 2개의 평론이 나와 주목을 끈다.
설준규씨(한신대 교수·영문학)와 임진영씨(연세대 강사·국문학)가 『창작과 비평』가을호와『민족문학사연구』제2호에 발표한「잘 팔리는 번역소설의 상업성과 문학성」「즐길 수 있는 지식과 공포의 세계」가 바로 그것이다.
두 사람에 의하면 이 같은 소설들의 성공은 기발한 착상·엽기성 등 흥미를 끌만한 요소들을 지역적인 지식의 표피에 싸 발라 지식과 재미를 동시에 원하는 요즘 독자들의 취향에 부합됐기 때문으로 분석되고있다.
또 문학을 하나의 상품으로 취급하는 대 자본이 물량공세를 통해 이 같은 소실들을 독서시장의 총아로 발돋움하게 만들었다고 설명한다.
나아가 국제화된 상업문화의 침투나 지식과 재미를 동시에 원하는 독자의 욕구변화를 사회변화의 한 징후로 첨삭 없이 받아들이되「인간존재의 가치」와「현실인식의 지평확대」를 추구하는 본격소설의 고유 영역이 이로 인해 축소되어서는 안 될 것이라고 못박는다.
설씨는 요즘 잘 팔리는 미국번역소설들의 특징으로 ▲삶의 일상 또는 현실에서 독자들을 아득히 떼어놓고 ▲비상한 지적능력과 범죄적 성향을 함께 지닌 사람을 주인공으로 등장시킴으로써 윤리적 판단을 유보케 한다는 등 네 가지를 든다.
당연한 논리적 귀결로 설씨는 이런 류의 소설이 잘 팔린다는 것은 우리 사회에 현실로부터의 일탈이나 가치문제에 대해 윤리적 판단을 유보하려는 욕구가 높은 수준에 이르렀음을 반증하는 징후로 볼 수 있다며 우려했다.
한편 임씨는 90년대 들어 우리 문화계의 가장 눈에띄는 특징적 현상으로 역사나 사회로부터 개인으로, 진지한 열정으로부터 가벼운 사색으로 옮아가는 경향을 꼽는다.
또 대중문화와 고급문화의 구분이 점차 희미해져 가는 것도 이 시대의 간과할 수 없는 문화적 특징으로 보탠다.
임씨는 자본의 문화지배력이 신장되고 문학의 현실대응력이 약화되는 시기마다 이 같은 현상이 반복적으로 나타났었다며『대중소설은 인간의 현실적 욕망을 반영하는데 뛰어나지만, 그 욕망을 비웃으면서 뛰어넘고자 하는 또 하나의 욕망까지 반영하는 일은 참된 문학의 몫으로 끝까지 남는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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