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우유전쟁] 21. 전봇대에 기대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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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나는 1927년 전라북도 김제군 만경면 화포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농사꾼이셨지만 선비다운 기개를 지닌 분이셨다. 슬하에 4남2녀를 두셨는데 난 장남이었다. 형제 많은 집 장남에겐 두 가지 길이 있다. 하나는 기관차처럼 앞에 서서 힘차게 끌어가는 역할이고, 다른 하나는 아버지의 가업을 이어받아 온순하게 사는 길이다. 내 속에서 분출하는 욕망과 활력 때문에 나는 기관차의 길을 선택했다.

어렸을 때 집안은 넉넉한 편이었다. 할아버지는 고을에 기근이 들자 곳간을 열어 사람들을 구휼하였고 서당을 지원하는 등 교육에도 관심을 갖고 적지 않은 재산을 투척했다. '사람을 길러야 미래가 있다'는 이런 정신은 아버지에게도 이어졌다. 아버지는 36년 소유한 전답 대부분을 팔아 향리에 장흥보통학교를 설립했다. 30년대 들어 일제는 내선일체를 이루기 위하여 이른바 황민교육(皇民敎育)에 주력해 전국의 면단위마다 보통학교(오늘날의 초등학교)를 설립했는데 만경면에도 면의 중심지인 만경리에 만경보통학교가 설립됐다. 그러나 만경리에서 멀리 떨어진 시골의 학생들은 먼 거리 때문에 통학이 어려워 학교 가기를 포기하는 경우가 많았다. 게다가 공립학교인지라 일본인 중심의 교육을 실시했기 때문에 거부감을 지닌 사람들이 자식들을 학교에 보내기를 꺼려했다. 이 때문에 전국적으로 지방의 의식 있는 토호와 유지들은 전답을 팔아 조선인 사립학교를 설립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아버지가 마을의 독지가 두 사람과 함께 세운 장흥보통학교도 이런 경우였다. 내가 초등학교 입학 적령이 되었을 땐 아버지가 학교를 세우시기 전이어서 십리길을 걸어 만경보통학교에 다녔다. 이 학교를 졸업한 뒤 곧장 전주로 나가 전주북중에 다닐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배움이 곧 힘'이라는 아버지의 신념 때문이었다. 그게 나에겐 행운이었다.

전주북중은 오늘날의 중.고등학교를 합친 학제로서 5년제였다. 광복 후 전주고등학교로 이름이 바뀌어 현재까지 인재들을 배출하고 있다. 나는 학교에 다니던 그 무렵 식민지 청년으로서 분노와 좌절을 느껴야 했다. 그래서 전주북중을 졸업할 무렵 나는 친구 한 명과 함께 당시 신출귀몰하는 전설적 인물로 회자되던 독립군의 김일성 장군의 휘하에 들어가기 위해 만주로 가려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돼 두 달 동안 유치장에서 지낸 뒤 풀려나기도 했다. 유치장에서 풀려나 낙향하자 사람들은 손가락질을 하며 비웃었다. 그러나 아버지만은 힘을 북돋워 주었다.

답답한 현실로부터 나를 구원해 준 것은 일제의 패망과 광복이었다. 46년 8월 나는 서울로 올라와 경성경제전문학교(후에 서울대학 상대로 개편)에 입학했다. 아버지는 나의 결심을 인정하고 장도를 축복해 주었으나 학비를 보태주지 못하는 처지를 몹시 안타까워했다. 나는 빈손으로 서울로 올라와 입학한 뒤 학비와 생계를 해결할 길을 찾아야 했다. '도둑질 말고는 무슨 일이든 다 한다'는 것은 고학생에게 딱 맞는 말이다. 나도 작은 책상 한 개 놓을 수 있는 좁은 방이라도 얻기 위해 무엇이든 다 했다. 그러던 중 나는 비교적 안정적인 일거리를 찾아냈다. 영등포의 방직공장 직공들이 빼내 온 원사(原絲)를 동대문시장에 넘기는 일을 하게 된 것이었다. 영등포에서 한강 인도교를 넘으려면 노량진의 경찰 검문소를 통과해야 하는데 통금시간부터 다음날 통금 해제 시간까지 나는 노량진 골목길 전봇대에 기댄 채 경찰들이 철수할 때까지 기다렸다. 이곳이 나에겐 인생의 학교였고, 명상터였다.

최명재 파스퇴르유업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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