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감성』과는 결별하겠다"|"또 다른 작품 세계 위한 통과의례 같은 것"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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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3면

『사람들이「감성의 황제」라고 부르면 감성의 황제다운 자리에, 사람들이「젊은 사랑의 연금술사」라고 부르면 마흔이 넘은 나이임에도 역시 젊은 연금술사 자리에, 또 사람들이 「타고난 이야기꾼」이라고 불러주면 이야기꾼의 의자에 나는 앉아 있곤 했다. 그것이 내가 원한 의자인가 아닌가는 결과적으로 중요하지 않았다. 나는 수많은 사슬에 묶인「소설기술자」가 아니냐….』
작가 박범신씨(46)가 인기작가로서의 자신의 실상과 허상, 사랑, 이미 지나가버린, 혹은 지상에는 존재할 수 없었던 순수에 대한 열정을 발가벗긴 장편『잃은 꿈 남은 시간』을 펴냈다.
73년 단편『여름의 잔해』가 중앙일보신춘문예에 당선, 문단에 나온 박씨는 『풀잎처럼 눕다』『겨울 강 하늬바람』『숲은 잠들지 않는다』『죽음보다 깊은 잠』『불의 나라』등 40여권의 작품집을 내놓으며 인기작가로 떠올랐다. 박씨는 작품 속에서 스스로 밝히고 있듯 젊은 사랑에 대한 감성적 문체와 타고난 이야기꾼 재질로 인기절정에 올랐다. 그런 그가 한 작가의 화려한 외면적 삶과 고독한 내면적 풍경을 그리고 있는 것이『잃은 꿈 남은 시간』이다.
TV다큐멘터리 리포터로 아프리카 취재여행을 떠난 인기작가 정영화가 킬리만자로 부근에서 증발한다. 그를 찾아 아내와 젊은 애인도 아프리카로 떠난다. 작가자신·아내·애인을 화음로 내세워 서로 조금씩은 다르게 각인된 작가 정영화의 초상을 그려나감과 함께 사랑의 실체를 박씨 특유의 감성적 문체로 찾고있는 것이 이 작품이다.
『이 소설을 쓰면서 나는 울었습니다. 인기작가라는 화려한 이름으로 살아온 지난 시간, 내가 만났던 성취와 상실을 고해하듯 쓰면서 만날 수 있었던 나의 모습은 영락없는 피에로였습니다.』
삶의 틀을 깨고 참다운 자유의 바다로 나가기 위해 증발된 정영화는 박씨 자신이다. 몇 해전 TV리포터로 아프리카에 갔을 때 박씨는 실제로 작품 속에서처럼 영영 그곳에 숨어들고 싶었다고 한다. 인기로 압축되는 세계의 허상이 아니라 원초적 실상과 만나기 위해.
『작가로서 자유, 그 자체를 추구하면서도 기실 가장 억압받고 살았습니다. 솔직이 인기에 구속돼 살았습니다. 남들이 나를「인기작가」로 부르는 그「인기」에 부응하기 위해 자유·영혼의 무게 등은 저버리고 기교만 키워왔는지도 모릅니다.』
인기작가 대열에 들어선 지난 15년 간 박씨는「인기」라는 관성에 시달려왔다. 한 개인을 밀실에서 광장으로 불러내 환호하고 혹은 인민 재판하는 그「인기」에서 내리고 싶었지만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다 한다.
『광장과 밀실, 영광과 패배, 성취와 상실사이를 오르내리던 인기라는 위대로운 에스컬레이터에서 이제 내리겠습니다. 나이 쉰 살을 바라보며 이미 다 빠져나가 버린 감성, 감성적 문체와도 이제 단호히 결별하겠습니다. 산 자신에게 화려한 인기를 안겨 주었던 감성적 문체와의 결별, 다음 작품세계를 위한 통과의례와 같은 작품이『잃은 꿈 남은 시간』이다. 남은 시간, 감성이 빠져나간 자리를 다른 무엇으로 채워야하는데 그 무엇이 아직 확실히 잡히지 않는다고 박씨는 말한다.
국교교사로 출발했던 박씨는 중·고교교사를 거쳐 올해 명지대 문예창작과 교수가 됐다.『작가인 이상 작품에만 매달려야 한다』며 전업작가로서의 순결성을 고집해오던 박씨는 주목받는「문제작가」에서 화려한 스폿 라이트에 시달리는「인기작가」로의 시행착오가 후배·제자문인들에게는 되풀이되지 않도록 하겠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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