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취재일기

높으신 분들의 '외압' 발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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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수사가) 어떻게 돼 가는지, 언제 끝나는지, 이 정도 물었을 뿐입니다."(김영주 산업자원부 장관)

"예식장에서 만난 서장에게 치안 상황을 물었을 뿐입니다."(이택순 경찰청장)

"경찰청장님과는 함께 근무한 적도 있고… 안부 삼아 농담하신 거죠."(정수일 강남경찰서장)

한국산업기술평가원(산기평)이 산자부 공무원의 밥값을 대납해준 사건 수사에 '외압'이 있었다는 주장이 제기되자 당사자들이 22일 내놓은 해명이다. 정리하자면, 장관은 '기관장으로서 궁금해' 이 청장에게 전화 한 통을 했고, 이 청장은 우연히 결혼식장에서 만난 정 서장에게 '안부 삼아' 몇 마디 물었다는 것이다. <본지 5월 22일자 12면>

그러나 수사 대상이 된 부처의 장관이 경찰총수에게 수사에 대해 묻고, 경찰청장이 실무 경찰서장을 질책하는 것은 부적절한 처신이다. 전화 건 사람은 아니라고 주장하더라도 이를 받는 당사자는 압력이라고 느낄 수밖에 없다. 그래서 '사법 정의에 어긋나는 도덕 불감증'(경실련 박완기 정책실장)이나 '전형적인 수사 외압'(한나라당 나경원 대변인)이라는 말이 나온다. 서울 일선 경찰서의 한 형사과장은 "내가 당사자라도 수사하라는 건지, 하지 말라는 건지 고민할 것"이라고 말했다.

산기평의 '밥값 대납' 의혹은 단순한 접대 관행을 넘어 '기관 차원의 조직적 로비'로 봐야 한다는 게 수사 관계자의 설명이다.

경찰에 따르면 산기평 간부들은 수년간 공무원들이 회식을 한 식당을 찾아가 식대를 대신 갚았다. 결제 수단은 산기평의 법인카드였다. 산기평은 예산의 약 90%를 산자부가 발주한 연구사업의 평가.관리 업무에서 얻는다. 산기평 노조 관계자는 이런 돈이 2000년 초 이후 수억원에 이를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런데도 이 청장은 정 서장에게 "밥값까지 수사한다면 뭐든지 다 수사해야겠네"라고 말했다 한다.

자신을 '퇴직 공무원'이라 밝힌 한 네티즌은 "'밥 한번 사겠다'는 말에 만나다 보면 어느새 돈봉투가 넘어오는 게 대한민국 현실"이라고 지적했다. 김 장관이나 이 청장의 주장처럼 외압이 없었다는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서라도 경찰은 밥값 대납 사건을 철저히 규명해야 한다.

천인성 사회부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