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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식간에 집 한 채 ‘왔다갔다’

중앙일보

입력

▶미술품 경매 현장에서는 번호표와 낙찰봉이 모든 것을 말해준다. 찰나의 차이를 놓치지 않는 경매사.

이코노미스트5월 15일 오후 5시. 그랜드 하얏트호텔 리젠시룸에는 각지에서 모여든 사람들로 북적였다. 이날 행사는 미술품 경매회사 K옥션의 열네 번째 경매. 리젠시룸 앞 데스크에는 현장에서 K옥션 가입을 받고 있었다.

연회비가 10만원이지만 이날 행사 전에 즉석에서 회원에 가입한 사람은 30명. 사람들은 줄을 서서 기다렸다. 총 224점의 미술품 출품, 600여 명이 참석한 이번 경매에서 달아오르는 미술시장의 열기를 확인할 수 있었다.

단상 위 거대한 스크린에 경매 대상이 된 미술품들이 비춰졌다. 사회자가 작품명과 작가명을 소개하고 나면 번호표를 든 사람들의 손이 여기저기서 올라간다.

경매시작가에서 20~30명이 손을 들었다. 동시에 사회자는 연이어 가격을 높인다. 700만원에서 경매를 시작했던 한 작품은 채 10초가 지나지 않아 1500만원으로 값이 올랐다. 결국 1700만원에 팔린 그 작품은 경매의 시작을 알리는 종소리에 불과했다.

경매시작가 5000만원에서 시작한 김흥수 화백의 ‘두 동무’는 순식간에 1억2500만원에 낙찰됐다. 또 다른 작가의 그림은 3000만원에서 시작해 금세 9200만원까지 올라갔다. 말 그대로 눈 깜짝할 사이에 집 한 채가 왔다갔다 하는 현장이다.

경매에 참가한 일부 사람은 특정한 그림이 나오면 응찰 번호표를 계속 들고 있었다. 돈을 아무리 내더라도 꼭 그 그림을 가져오겠다는 결연한 의지인 셈이다. 두 사람 이상이 번호표를 들고 있는 동안에는 가격이 계속 올라간다.

초보자가 투자하려면…

■ 현장에서 감을 길러라
·화랑에서 선호작가와 분위기를 파악한다.
·경매에 참석해 가격을 꼼꼼히 기록한다.

■ 순수 여유자금으로 투자하라
·미술품은 3~5년 기다려야 가치 드러난다.
·200만~1000만원까지 여유 필요하다.

■ 한 작가에 집중하라
·스스로 확신할 수 있는 작가를 찾아라.
·다양하게 사는 게 안정적인 게 아니다.

■ 전성시대 작품 찾아라
·같은 작가 작품도 소재·내용따라 값 다르다.
·생소한 장르에서 의외의 물건 발견할 수 있다.

휴대전화 들고 정보 교환도

현장은 예약한 참가자보다 많은 사람이 몰려 의자가 모자랐다. 화분 가장자리, 의자 팔걸이 등 앉을 수 있는 곳은 어디든 앉아 경매 책자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아들과 함께 온 아버지는 그림을 유심히 보면서 귓속말로 아들에게 지시했다. “들어, 내려”를 반복하면서 가격이 적정한지를 판단하고 있었다. 30대로 보이는 여자는 휴대전화로 그림 가격의 변화를 계속 얘기하면서 전화 저편에 있는 사람의 지시에 따랐다.

8500만원까지 번호표를 들다가 값이 더 올라가자 손을 내렸다. 50대로 보이는 한 여성은 1억4000만원이 넘어가도 번호표를 든 손을 내릴 줄 몰랐다. 결국 그 그림은 그녀의 차지가 됐다.

하지만 이날 참가한 600명 중 손을 한 번이라도 들어본 사람은 어림잡아 100명이 안 돼 보였다. 작품 224점에 최종 낙찰자 수는 160여 명이었다. 여기에는 전화와 서면 응찰까지 포함된다. 나머지 사람들은 내내 도록(圖錄)을 손에 들고 낙찰가격을 적고, 응찰하는 사람들의 손을 바라봤다.

K옥션 김순응 대표는 “회원의 연령과 직업이 갈수록 다양해진다”며 “예전에는 주로 나이 많은 수집가가 대부분이었지만 요즘은 특정한 연령이 의미가 없다”고 말했다.

처음 미술품 경매에 참가했다는 S(29)씨는 “직장에서도 미술시장이 인기라 트렌드를 알기 위해 왔다”며 “그림을 사지 않더라도 경매에 직접 참여해 보는 경험이 중요한 것 같다”고 말했다.

엄중구 한국미술품감정연구소장은 응찰표와 낙찰 확인서를 손에 들고 뒤쪽에 서 있었다. 그는 “사업상 경매에 자주 참석한다. 화랑에서…”라고 말을 끝내지 못하고 “끝나고…끝나고 얘기합시다”라며 급히 한발짝 앞으로 나가 경매에 집중했다.

경매 현장은 사람들로 북적였지만 경매가 시작되면 사람들의 눈이 경매를 진행하는 K옥션 김 대표의 손끝을 따라 움직였다. 여기저기에서 올라오는 번호판을 보느라 김 대표의 눈도 빠르게 움직였다. 직원들은 어느 한구석이라도 시선에서 제외될까 팔을 뻗어 숨은 번호판을 찾아냈다.

한 작품이 낙찰되는 데 걸리는 시간은 1분도 되지 않았다. 5초 만에 유찰되는 작품부터 몇 분을 두고 치열한 경쟁을 벌이는 작품까지. 그 시간은 평균 30초.

천경자 화백 작품 12억에 낙찰

이날 가장 높은 값에 낙찰된 그림은 천경자 화백의 ‘초원Ⅱ’로 12억원에 팔렸다. 낙찰률은 86.22%, 낙찰총액은 118억2500만원에 달했다. 김 대표는 “박수근, 김환기, 이중섭 등이 밀리언달러 클럽 작가들인데 이번 경매로 천경자도 이 클럽에 들게 됐다”고 말했다. 밀리언달러 클럽은 박수근의 ‘노상’이 2006년 12월 K옥션 경매에서 10억4000만원에 낙찰되며 국내에 처음 등장했다.

비단 이번 경매뿐 아니다. 지난 5월 9~13일까지 서울 삼성동 코엑스 태평양·인도양 홀에서 열린 한국국제아트페어(KIAF·이하 아트페어)의 열기도 뜨거웠다. 2002년 부산 벡스코에서 열린 후 이번이 6회째다. 지난해 75억원에 이어 올해 175억원의 매출을 올렸다.

100% 이상의 매출 증가율을 기록한 셈이다. 행사를 주관한 한국화랑협회의 정종효 국장은 “2002년 처음 아트페어를 시작할 때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분위기가 달라졌다”며 “세계 미술시장에서 0.1%를 차지하는 우리나라 미술시장이 주목받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올 미술 경매시장 1000억원

서울옥션 통계에 따르면 처음 미술품 경매를 시작한 1998년에 비해 최근 열린 2007년 3월 경매는 낙찰금액이 60배나 늘었다. 낙찰률에서도 큰 차이를 보인다. 1998년에 19.43%의 낙찰률을 기록한 후 꾸준한 성장을 보이다 2007년 3월 66.87%까지 올랐다.

K옥션과 서울옥션은 각각 갤러리현대와 가나아트갤러리에서 운영하는 미술품 경매회사로 국내 미술품 경매시장을 이끌고 있다. 지난해 두 회사가 각각 296억, 273억원이었는데 올 해 두 회사는 연말까지 각각 400억~600억원의 낙찰액을 예상하고 있다.

박혜경 서울옥션 이사는 “지난해 국내 미술품 경매시장은 600억원 규모”라며 “업계에서는 올해 미술품 경매시장을 1000억원까지 바라보고 있다”고 밝혔다. 2005년 167억원에서 큰 폭으로 성장한 것을 알 수 있다.

금융권에서도 미술품 바람이 불고 있다. 은행 영업점에 그림을 전시해 갤러리 분위기를 내는가 하면 미술품에 투자하는 법을 주제로 강좌를 열기도 한다.

K옥션과 제휴를 맺은 하나은행은 최근 80억원 규모의 아트펀드를 선보였고 VIP 고객을 위한 미술품 관련 강연을 마련하고 있다. 굿모닝신한증권은 국내 최초로 아트펀드 ‘서울 명품아트사모1호펀드’를 내놓았다.

금융권까지 미술 바람에 가세하고, 미술 본연의 가치 대신 재테크 상품으로 인식되는 등 거품을 우려할 만한 요소도 많다. 하지만 미술 거래 저변 확대, 시장 참가자 증가, 거래 미술품 증가, 국민 소득 향상 등 미술품 가격이 올라갈 요소가 늘고 있다는 점에서 현 시점을 거품으로 진단하기는 어렵다는 주장도 있다.

온라인 미술품 경매 사이트인 포털아트의 김범훈 대표는 “미술품은 단 한 개밖에 없기 때문에 한번 가치를 인정받으면 값이 올라갈 수밖에 없다”며 “미술품 가격 결정 과정에 논란이 있을 수 있지만 앞으로도 수요는 점점 늘어날 것”이라고 예상했다. 미술시장은 앞으로도 뜨거워질 전망이다.

이석호·최은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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