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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lkholic 채인택 런던취재기 #3] 도시건축과 문화, 그리고 역사와 더불어 걷기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너무 매력적이라 위험한 콘텐트 사이로 걷다

런던대 본부가 있는 블룸스베리의 러셀 스퀘어에서 한 20여분 걸으면 서점들이 줄지어 있는 케임브리지 거리가 나타납니다.

▶ 트라팔가 광장을 남쪽에서 북쪽으로 본 사진이다. 가운데 있는 건물이 내셔널 갤러리다. 르네상스 미술과 인상파 작품이 볼만하다. 규모는 파리의 루브르나 피렌체의 우피치, 마드리드의 프라도보다 한참 작지만 알차다.

이곳에서 몇 블록만 가면 차이나 타운의 중국 식당.가게들과 공연장으로 가득 찬 웨스트 엔드로 접어듭니다. 레스터 스퀘어 역을 지나면 넬슨 동상이 거대한 기둥(칼럼) 가운데에 서 있는 트라팔가 광장으로 이어집니다. 이 광장의 정면에는 내셔널 갤러리와 내셔널 포트레이트 갤러리가 있습니다.

▶런던 한복판인 트라팔가 스퀘어(광장). 가운데 거대한 기둥 위에 호레이쇼 넬슨 제독의 동상이 보인다. 넬슨 제독이 나폴레옹 함대를 물리친 트라팔가 전투를 기념해서 세웠다. 사실 런던은 프랑스 사람에게 기분 나쁘게도 대불 전쟁 승리를 기념하는 지명으로 가득하다. 심지어 영불해협을 통과해서 파리로 가는 유로스타 기차가 출발하는 역 이름부터가 워털루다. 나폴레옹을 패배시킨 워털루 전투를 기념한 것이다. 기둥 너머로 영국 국회의사당인 웨스트민스터 궁이 보인다.

사실 이 코스는 대단히 위험합니다. ^^ 새 책, 헌 책에 100년도 넘은 골동품 서적까지 온갖 멋진 책으로 가득 찬 서점에서 읽을 것을 고르거나 중국 식당에서 저녁을 먹게 되기가 쉽기 때문이죠. 웨스트 엔드에서 뮤지컬이나 연극, 또는 영화를 보거나 갤러리에서 그림을 볼 수도 있죠. 아니면 트라팔가 광장 근처에 있는 세인트마틴인더필드라는 교회에서 무료 바로크 음악 연주를 듣느라 걷기를 중단하는 경우가 왕왕 있기 때문입니다. 너무 매력적인, 그래서 역설적인 위험이죠.

두 개의 갤러리를 등지고 트라팔가 스퀘어를 왼쪽으로 빠져 나가면 차링크로스 역이 나타납니다. 역 왼쪽의 좁은 골목길을 따라 5분쯤 걸으면 강변에 엠방크먼트(embankment) 지하철 역이 보입니다. 자그마한 역을 관통해 빠져나가자마자 오른쪽 계단으로 오르면 차링크로스 철교 옆에 붙은 좁다란 보행자 전용 다리가 나옵니다. 헝거포드 브리지라는 이름의 다리입니다. 이 다리를 지나 템즈강을 건너 사우스 뱅크라는 복합문화 단지에 이르는 것이 제 걷기 코스였습니다.

▶걸을수록 달라지는 도시의 표정

차링크로스 다리 앞에 있는 같은 이름의 기차역은 과거 화재로 불타는 바람에 새로 지은 겁니다. 그런데 같은 역사의 시내 쪽은 19세기 양식을 남겨두었지만 강변 쪽은 초현대식으로 지었습니다. 두 얼굴의 건물이지요. 제 지도교수는 이를 두고 '포스트 모던'의 실마리를 제공한 건축물이라고 하더군요. 차링크로스 역을 지나며 이 역사 건물의 앞뒤의 상반된 두 얼굴을 보는 재미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헝거포드 브리지를 한걸음두걸음 걸으면서, 거리에 따라 모양이 조금씩 달라보이는 포스트 모던의 상징물을 보는 것은 묘한 즐거움을 줬습니다.

물론 다리 양쪽으로 펼쳐진 경치도 훌륭했습니다. 세인트 폴 성당 등 유명 관광지들이 한 눈에 보이거든요. 템즈강을 걸어서 건너는 운치는 또 어떻고요. (한강을 쉽게 걸어서 건널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런던에 손님이 찾아오면 예외없이 이 코스로 모셨는데, 감탄하지 않는 분이 별로 없었습니다. 한국에서 온 분들은 물론 현지에 있는 동안 유럽 영화제 등에서 사귄 사람도 런던에서 만나면 이 코스로 안내했는데 마찬가지로 즐거워하더군요. 숙취 등으로 걷기가 힘들다는 일부 분들만 제외하고요.(^^;;)

▶헝거포드 다리를 건너 사우스뱅크로 가는 길. 원래 좁고 낡은 다리였는데 밀레니엄 행사를 하면서 완전히 새로 보수해서 런던 명물이 됐다.


헝거포드 다리 건너 사우스뱅크에는 런던 필하모니의 본거지인 로얄패스티벌홀과 국립극장(NT:National Theatre), 국립영화관(NFT: National Film Theatre), 영화영상박물관(MoMi: Museum Of Moving Image: 지금은 폐관하고 식당과 서점이 됨)이 있습니다. 당시 미디어와 문화연구(Media and Cultural Studies)를 공부하던 저에겐 안방 같은 곳이었습니다. 주말에는 강변 대형 산책로에 헌책방이 열립니다.

바로 앞에 시원한 템스강이 펼쳐진 경치도 좋았습니다. 왼쪽으론 영국 국회의사당인 웨스터민스터 궁과 빅벤이 보이고, 오른쪽으론 워털루 다리가 보입니다. 사우스뱅크의 강변쪽은 끝없이 이어지는 산책로입니다.

런던 중심지 템즈강변은 강 한쪽이 도로면 다른 한쪽은 보행로만 있는 구조입니다. 도로라도 자동차 전용도로가 아니고 보도도 있습니다. 도시 자체를 자동차가 아닌 사람 중심으로 만들어왔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달리 말하면 걷기에 편하도록 설계한 거죠. 게다가 끊임없이 그렇게 개선하고 있기도 합니다.

▶갈수록 걷기 좋아지는 런던

▶프라팔가의 새 명물인 마크 퀸의 조각. ''임신한 앨리슨 래퍼''. 사지가 없어 ''의지의 비너스''로 불리는 앨리슨 래퍼(Alison Lapper)가 모델이다. 불굴의 의지로 유명한 이 여인은 한국도 방문한 적이 있다.

사우스뱅크는 원래 런던의 템즈강변에 여럿 있던 도크, 즉 화물 선착장의 하나였다고 합니다. 20세기 초대영제국 시절까지는 오가는 무역선으로 가득 찼다고 하는데 20세기 후반 들어 쇠락해지자 문화복합 공간과 사무실 빌딩 등을 지어 재개발한 곳입니다. 21세기를 앞두고 밀레니엄 행사를 하면서 런던 아이(London Eye)라는 회전 전람차를 설치하기도 했습니다. (007에도 나오죠) 시커먼 쇳덩어리였던 헝거포드 브리지도 밀레니엄 행사에 맞춰 하얀 기둥의 현수교로 바뀌었습니다. 칙칙하던 다리가 넓어지고 깨끗해져 걷기에 더 좋아진 것은 물론입니다. 이방인이 먼저 발견한 것을 당국이 관광용으로 수리했을 것이란 생각입니다.

사우스뱅크는 템스강변 보행로를 따라 웨스트민스터 궁으로 이어집니다. 그 사이에 파격적인 작품 전시로 유명한 사치 갤러리가 있습니다. 어차피 걷는 것, 이렇게 문화와 자연을 동시에 즐기면서 기분 좋게 하는 게 건강에도 더욱 좋겠지요. 몸과 가슴을 모두 기쁘게 하는 걷기겠지요.

▶마법 같은 도시 걷기의 매력 줄이어 소개

제 과거 경험을 바탕으로 한 오늘 글은 런던 걷기에 대한 일종의 맛뵈기입니다. 이번 취재로 제가 짐작했던 것보다 훨씬 많은 걷기 코스가 있다는 것을 확인했는데, 앞으로 꾸준히 소개하도록 하겠습니다. 대부분 도시와 자연, 그리고 문화와 역사를 결합한 걷기 프로그램입니다. 제 옛 경험과 일맥상통하더군요.

런던에는 여왕 즉위 축하를 위해 개발한 보행 루트, 다리 하나와 연계해서 만든 보행 프로그램, 다이아나 왕세자비를 추모하는 걷기 길도 있습니다. 구청이 만든 보행로, 걷기 팬들이 직접 개발해 보급하는 보행로, 가이드를 두고 하는 걷기 관광, 전문 안전가드와 함께 하는 들판 걷기, 가족이나 아이들과 걷기, 공원 걷기, 도심 걷기 등 끝이 없습니다. 빠져들기로 말씀드리자면 수렁 같다고나 할까요.

종류가 두툼한 사전의 쪽수만큼 다양하고, 내용이 영화처럼 즐겁고, 하나하나가 재즈인양 개성있는 게 런던의 걷기 프로그램이라고 감히 말씀 드립니다. 짬 나는 대로 런던 걷기의 각론에 하나하나 들어가 보겠습니다.

추신: 아쉽게도, 제 체중은 서울에 돌아와서 1년도 안 돼 도로 환원됐습니다. 일을 핑계 대지만 사실은 생활습관의 변화가 가장 큰 원인이겠죠. 걷기를 계속 하든지 다른 운동에 취미를 붙였어야 하는데, 후회막급입니다. 하지만, 서울에서도 다시 열심히 걸으면 과거의 영광이 재현되지 않을까 기대하면서 다시 칼을 갈아봅니다.

채인택 기자(중앙일보 국제부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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