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스파이(분수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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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69년 8월,미사일 유도체계를 개발하는 기업에 근무하고 있던 프랑스 전자공학 기술자 필립 라톨은 회의 참석을 위해 소련을 방문했다. 레닌그라드에 호텔을 정하고 시내관광에 나섰던 그는 음식점에 들어갔다가 매력적인 금발미녀를 사귀게 되었고,이들은 급속하게 가까워져 곧 뜨거운 관계로 발전했다.
라톨은 다은날 낯선 남자들의 방문을 받았다. 그들은 라톨의 정사장면을 찍은 12장의 사진을 제시하면서 공대공미사일의 자동 유도장치에 관한 정보를 제공하라고 협박했다. 라톨은 거절했으나 그들은 그 금발미녀가 소련군 상급장교의 처며 협력을 거부하면 기소하여 장기형에 처할 것이라며 그를 모스크바의 루비얀카 형무소에 투옥했다. 라톨은 더이상 버티지 못하고 그들의 요구를 받아들였다. 그는 KGB의 덫에 걸려들었던 것이다.
구 소련이 서방의 첨단기술에 관한 정보를 빼내기 위해 스파이 작전을 썼던 것은 공업화시대가 예고되었던 30년대부터의 일이었다. KGB에 그 주된 임무가 맡겨졌음은 물론이며 KGB는 라톨사건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미인계를 즐겨썼다.
서방으로부터 첨단기술에 대한 정보를 빼내가는 KGB의 작전은 이를테면 오늘날 산업스파이의 한 전형인 셈이다. 산업스파이는 기업의 생산이나 판매 등에 관한 비밀을 탐지하는 행위,혹은 사람을 일컫는다. 제3자가 정보나 비밀을 빼내 경쟁 상대방에 팔아먹는 경우도 이따금 있으나 경쟁 업체들간에 이루어지는게 보통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산업화가 박차를 가하기 시작한 60년대부터 산업스파이 문제가 이따금 사회문제로 등장했다. 경쟁업체에 위장 침투하여 정보나 비밀을 빼내는 것이 가장 흔한 수법이다. 최근에는 이동통신을 둘러싼 경쟁업체들간의 정보 빼내기가 주목을 끌기도 했다. 요즘 일본에서는 KGB요원출신의 주일 러시아 통상대표부 간부가 고성능 반도체 기억소자와 통신위성용 중계증폭기를 빼내려다 발각된 사건이 발생해 옐친 러시아대통령의 방일을 앞두고 양국간 외교마찰을 빚고 있다고 한다. 러시아의 급박한 사정을 짐작할만 하지만 KGB의 잔재가 아직도 건재하고 있다는 사실이 기이하게 느껴진다.<정규웅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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