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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공주라니, 뭐 감사하죠 … 호호"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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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SUNDAY

16일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를 만났다. 마침 이날은 46년 전 박 전 대표의 부친인 박정희 전 대통령이 병력을 이끌고 한강대교를 건너 ‘18년 권좌’에 첫발을 디뎠던 바로 그날이었다. 서울의 한 호텔에서 열린 5·16 민족상 시상식에 다녀온 박 전 대표는 부모에 대한 상념을 비교적 소상히 끄집어냈다. 빡빡한 일정 때문인지 박 전 대표의 얼굴은 다소 피곤해 보였다. 그러나 말에는 힘이 있었고 “국민의 신뢰”를 강조하는 대목에서는 탁자를 세 번 두드리는 등 제스처도 풍부했다. 머리는 내렸으며 ‘전투복(바지)’ 차림이었다. 대담=최훈 정치에디터, 정리=강주안·김선하 기자


사진= 신동연 기자

-굉장히 바쁘시죠?
“(가방에서 수첩과 볼펜을 꺼내며) 예, 항상 그래요. 창간을 언제 하신 거예요?”

-3월 18일입니다. 보신 적 있으신가요?
“있습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유일하게 우리가 일요일에 신문이 안 나왔던 국가입니다.
“OECD 중에 유일하게 우리가 하고, 안 하는 게 많아요.”

-바쁘실 텐데 중앙SUNDAY에 인터뷰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휴, 별 말씀을.”

-우선 저희가 일요일 신문이다 보니까 비교적 딱딱한 얘기보다….
“예, 여유 있는 얘기들….”

-박 전 대표님 하면 많은 분이 박정희 전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를 떠올립니다. 두 분의 모습 중 가장 아름답게 기억되는 장면을 소개해 주세요.
“학생시절이었는데요, 부모님이 국빈으로 호주와 뉴질랜드를 방문하신 적이 있어요. 제가 모시고 같이 갔는데 비행시간이 좀 길잖아요. 어머니께서 바느질도 하고 그러셨어요, 비행기 위에서. 그런데 아버지께서 그 모습을 보시면서 스케치, 원래 그림을 잘 그리시거든요, 유화도 그리시고. 어머니 모습을 스케치해 어머니한테 보라고 주시니까 어머니가 ‘아, 내가 이렇게 못났느냐?’ 그랬더니 아버지가 ‘그럼 다시 그리겠다’며 다시 스케치를 하셨어요. 어머니 목에 점이 있습니다. (손가락으로 목을 가리키며) 이상하게 저도 목에 여기 점이 있는데, 그 점까지 그리신 게 뚜렷이 제 기억에 남아요. ‘영수에게’ 이렇게 사인을 해 주시고, 웃으시고 하며 단란했던 게 기억납니다.”

-몇 학년 때였나요.
“제가 고등학생 시절이었을 거예요.”

-육 여사가 한센병 환자들을 많이 돌봤는데 어머님 모습 중 이것만은 꼭 닮고 싶은 게 있다면.
“어머님은 참 거짓이 없으셨어요. 제가 뵙기에는 어떻게 저렇게 열심히 하시는가 감탄을 하는데도 항상 어머니는 스스로를 돌아보시며 부족한 점이 없나 이렇게 거울을 깨끗이 닦듯이 사시던 모습이 저한테는 백 마디 말보다도 큰 교훈이 됐죠. 아, 인생은 저렇게 살아야 되는 거다, 거짓없이. 또 어려운 이웃에 대한 배려도 그냥 가서 위로도 하셨지만, 어떻게 하면 자립하게 도와줄지 신경을 많이 쓰셨죠. 한센병 얘기도 하셨지만 그분들이 어떻게 자립할 수 있을까, 돼지를 보급해 주고. 그것도 저에게는 큰 교훈이 됐죠.”

-어린 시절에는 아버지와 어머니 중 누구를 더 좋아했나요.
“저는 ‘어머니ㆍ아버지 다 좋아요’ 그래요. 제 자신이 부모님의 반반인데, 제가 저 자신을 부인할 수 있습니까? 또 세상에 자식이 어느 한 부모만 좋다고 그러는 사람 별로 없잖아요.”

-어느 분이 더 엄하셨나요.
“어머니가 좀 엄하셨죠.”

-야단맞은 적도 있나요.
“아단맞는다는 표현 자체가…. 어머니께 ‘선생님께 야단맞았어요’ ‘할머니께 야단맞았어요’ 그러면 ‘어른이 말씀하시는데 야단쳤다고 하는 것은 우리 예법상 안 된다’고 하셨어요. ‘걱정하셨다’. 저는 지금도 그때 배운 대로 써요. 어머님이 그렇게 걱정하고 그러신 기억은 별로 없지만 그런 말을 한 번 들으면 가슴에 새겨서 두번다시 똑같은 잘못을 안 하게 노력했어요. 그래서 먼저 어머님이 어떻게 생각하시는가 여쭙고 했어요.”

-만약 부모님이 박 전 대표의 지금 모습을 보신다면 어떻게 생각하실까요.
“부모님께서 하늘나라에서 내려다보시면 ‘힘내서 잘 해라’ 하고 격려해 주실 것 같아요. 부모님은 우리한테 자립성ㆍ독립성을 키워주기 위해 애쓰셨거든요. 누가 도와줄 수 있어도 혼자 해봐라, 제가 아주 어릴 때도 버스 타고 혼자 집까지 와봐라 하시고. 그런 식으로 고생도 해봐야 한다는 거였어요. 제가 지금 하고 있는 일이 우리나라를 위해서 어떻게든지 우리나라를 편안하고 안전하고 잘사는 선진국으로 만들어보겠다는 일념밖에 없거든요. 그걸 부모님이 너무 잘 아실 거라고 생각해요. 제 마음을 잘 아실 것이기 때문에 ‘열심히 잘해서 한번 국민들 모두 행복한 나라를 만들어보라’고 격려해 주실 것 같아요.”

-박 전 대통령 유고 시 휴전선을 먼저 염려했다는 일화가 유명한데, 그런 개인적 시련 앞에서도 국가를 먼저 생각할 수 있었던 것은 청와대에서 받은 교육 때문인가요.
“청와대 생활이라는 게 가족생활도 있지만 큰 부분은 항상 나라 걱정이에요. 나라에 일어나는 일, 외국과의 관계. 그런 손님들과 만나고. 아버지의 걱정, 아버지의 생각, 또 어머니가 불우시설에 갔다 오셔서 거기에 대한 얘기 하시고, 새마을 지도자 만났을 때의 느낌을 많이 얘기해 주셨어요. 그걸 들으면서 국가 운영이라는 게 이런 거구나. 나라에 대한 관심이 제 피와 살이 될 정도로. 대통령의 고뇌라는 건 이런 것이 있구나. 그걸 저도 관심을 가지고 살고, 우리나라 안보 문제도 그때는 지금과는 상황이 굉장히 달랐거든요. 대통령의 임무가 뭐겠어요. 우선 나라를 안전하게 지키는 것이고, 나라가 안전해야 경제활동도 있는 거니까. 이런 게 저의 관심사가 돼서 항상 얘기하는 게 저도 체질화되지 않았는가 생각합니다.”

-대선 출마에 대한 동생들의 생각은 어떤가요.
“동생들은 제가 나랏일을 하는 것에 대해서 반대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힘이 되어줄 것이라 생각합니다. 제가 동생들에게, 가족ㆍ친지한테 도와달라고 권하기는 어렵겠지만 친지가 돕겠다고 하면 고맙게 생각을 하죠.”

-당내 경선과 본선에서 가족ㆍ친지들이 지원하겠다면 자유롭게 하라고 하실 건가요.
“고맙게, 감사하게 생각해요.”

-테니스나 단전호흡을 하셨는데 요즘처럼 스트레스를 받을 때는 어떻게 해소합니까.
“옛날에는 글도 많이 썼고요, 명상을 하거나 그렇게 합니다.”

-그렇게 하면 스트레스가 좀 해소되세요?
“예.”

-명상은 주로 어느 시간에….
“차 안에서 할 수도 있고요. 지금은 조용히 앉아서 시간을 갖는 일이 거의 없어요. 자기 마음 먹기에 따라선 집중만 할 수 있다면 차 안에서도 가능한 거고 자기 직전에도 가능한 거고.”

-‘싱글’이라는 것에 어떤 장ㆍ단점이 있는지.
“단점이라고 하면 좀 외로운 거. 장점은 저에게 주어진 시간이나 열정을 전부 공적 업무를 위해서 다 바쳐서 할 수 있는 게 아닌가 싶어요. 그동안에, 제가 지금보다 훨씬 젊었을 때 어려움을 많이 겪어서 제가 글도 많이 쓰고 책도 많이 읽었는데 그때 제가 명심해야 할 것은 노트를 했어요. 일기도 쓰고. 제가 노트한 것이 노트북 몇 권이 돼요. 제가 지금 어떤 인생을 살고 있나, 정치인이든 뭐든 간에 지금 내가 어떤 가치관을 가지고 어떻게 살고 있는가를 돌아볼 때 내가 이렇게 살아야겠다, 이런 인생이 바른 길이 아니냐, 제가 읽고 쓰고 한 거의 그대로 가고 있습니다. 그만큼 자기가 어떻게 생각하고, 어떤 글을 읽고 하는 게 영향을 미친다는 걸 느껴요. 인생이 하나라면 그 절반은 습관과 가치관을 만드는 데 보내고 나머지 절반은 자기가 만든 가치관과 습관대로 살 수밖에 없다는 말이 맞는거 같아요.”

-사람을 판단하는 기준이 궁금합니다. 인사의 기준이랄까.
“제가 당 대표로 있을 적에도 당의 인사가 있었잖아요. 그 직책을 가장 잘할 수 있는 분, 그것을 위주로 해서 제가 인사를 했습니다.”

-성품적 측면에서는요?
“신뢰할 수 있는 그런 성품. 아무리 똑똑하고 머리가 잘 돌아가고 학위도 많이 받고 실력이 있다 하더라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이해관계에 따라 쉽게 마음이 변한다면 그거 아무 소용이 없잖아요. 같이 일하려면 우선 서로 믿을 수 있어야 하니까 그런 것도 중요하겠죠.”

-현재도 우리 사회에서 여성들이 남성에 비해 차별받고 있다고 느끼십니까.
“그런 면이 있지요. 아직도 개선할 부분이 있는데, 정치권으로 얘기하면 제가 10년 전에 들어왔는데 그때는 여성에 대한 편견이랄까 어려운 점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많이 변했어요, 정치권도. 지금은 ‘여성이기 때문에 약점이구나’ 느낄 때는 있지만 여성이라 불가능한 것은 없습니다. 21세기에도 여성이냐 남성이냐 한다는 것은 좀 시대에 안 맞는 얘기고. 전 세계적으로 대처 총리나 메르켈 총리, 골다 메이어 여사라든지 엘리자베스1세, 얼마나 나라를 위해 일 잘하고 위기에서 나라를 구했습니까. 엘리자베스 1세 같은 경우는 1000년, 지난 세기의 가장 훌륭한 CEO라는 평가까지 받잖아요. 그런 것을 볼 때 여성이냐 남성이냐가 문제가 아니고 그 사람의 가치관, 사람됨, 그런 게 중요한 거 아니겠어요.”

-지난해 지방선거 유세 기간 중 당했던 테러의 상처는 어떤 상태인지.
“수술을 잘해주셔서 일상생활을 하는데 전혀 불편함이 없습니다. 5월 20일이네요. 1년이 되는 게.”

-성형은 완전히 끝났나요.
“6개월을 보자고 하셨어요, 의사 선생님이. 안 좋게 되면 (수술을) 다시 해야 되는데, 수술을 잘해주시고 또 제가 낫는 힘이 강하답니다, 말씀에 의하면. 그래서 6개월 지난 후에 수술 안 해도 되는 걸로 됐어요.”

-테러 당시에 어떤 생각이 드셨습니까.
“조금 지나니까 통증이 막 오고, 얼굴이 막 이렇게 벌어지… 이렇게 자세한 얘기까지 하면 듣기에 끔찍하실 텐데 너무 얼굴이 크게 갈라져서 수박 쪼개지듯이, 한 손으로 잡아도 감당이 안 됐어요. 자꾸 벌어지는 걸 제가 감당을 할 수가 없었어요. 사진 보면 이렇게 두 손으로 꼭 잡은 게 있는데 그렇게 하지 않으면 얼굴이 벌어지는 걸 제가 감당할 수가 없었어요. 나중에 의사선생님이 지혈을 잘했다고, 지혈을 못했으면 큰일날 뻔했다고 하셨죠.”

-그때 상처가 기적적으로 치명적인 부위를 빗겨가서 역설적으로는 행운이었다고 했습니다.
“제가 수술대 위에 이렇게, 그러니까 침대죠, 이동 침대. 거기 누워서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어머니도 테러로 흉탄에 돌아가시고, 아버지도 테러로 돌아가셨는데, 나까지 이런 테러를 당한다… 당했다. 이건 나에게 주어진 운명이 도대체 어떤 것이냐, 그런 생각을 참 많이 했죠. 그러나 병원 문을 나서면서는 제가 그렇게 생각했어요. 간발의 차이로 나는 죽을 수도 있었다. (굳은 얼굴로 앞쪽을 응시하며) 조금만 더 상처가 깊었으면 저는 이세상 사람이 아닌데 이미 한번 죽은 목숨인데 덤으로 사는 거 아니냐. 나라와 국민을 위해서 모든 것을 바쳐보겠다는 다짐을 하면서 제가 병원 문을 나섰죠.”

-간혹 ‘공주’라는 얘기를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 말을 들으면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뭐, 공주라는 말 자체가 뭐 나쁜 단어는 아니잖아요. 그런데 부모님이 돌아가신 지 30년이 넘었는데 지금까지 공주라고 그러니까… 뭐 감사하다고 해야 되겠죠.(인터뷰 중 가장 크게 웃음)”

-‘가족이 곁에 있었으면’ 하는 생각이 드실 때는 언제인가요.
“지금은 내가 꼭 가족을 갖겠다는 생각은 없습니다. (두 손으로 크게 원을 그리며) 오히려 우리나라에 많은 가족이 살잖아요. 교육도 시키고 일자리도 얻어야 하고 그러는데 (그런) 가족들이 행복하게 사는 걸로 제 행복을 삼으려는 생각이지 제가 지금 가족을 따로 갖겠다는 생각은 전혀 없습니다.”

-청와대 나와서 18년간 마음고생을 상당히 많이 했다는 글도 쓰셨는데.
“적혀 있는 그대로고요. 아이구 내가 왜 태어났냐, 그런 거 원망하면 안 되는데 너무 힘드니까 내가 태어나지 않았으면 이런 고통을 몰랐을 건데… 막 그런 생각까지 하고 그랬죠. 진짜 인생의 고통이랄까, 저 바닥까지 갔다 왔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때는 힘들었지만 지금 제가 정치도 하고 활동하면서 느끼는 것은, 고생을 일부러 그렇게 사서 할 사람이 없죠. 누가 고통스럽게 그러겠습니까. 그러나 운명적으로 거기 던져졌으니 벗어나려 발버둥도 치고 어떻게 하면 내가 극복할까 자꾸 생각도 많이 하는 거 아니에요? 그때 그 어려운 시절이 나한테는 많은 공부가 되지 않았겠나, 지금 정치하는 데도. 그런 생각을 합니다.”

-고민할 때 화두를 하나 잡았다면 어떤 건가요.
“그렇게 고통스러운 시절은요, 마음의 때를 씻어내는 시절이라고 생각해요. (옷을 빨듯 두 손을 비비며) 빨래를 막 하듯이.”

-요가로 치면 업(業)을 정화했던 셈인가요.
“그렇죠. 이 세상에 번쩍거리는 것도 있고, 부귀영화도 있고, 소위 인간들이 추구하는 좋은 게 많이 있을 거 아녜요. 높은 자리…. 그런데 하나도 그게 매력이 없어요. 가치가 없어요, 전혀. 마음의 평화가 가장 중요하다, 그리고 마음의 평화를 이루는 데 가장 중요한 것은 양심이 편해야 된다, 그러려면 자기가 자기를 돌아봤을 때 떳떳하고 올발라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올바르게 사는 게 지혜다…. 다른 게 지혜가 아니고 불구덩이, 어른들은 이게 만지면 뜨거운지 아니까 안하잖아요. 그러나 아기들은 뭔지 모르니까 하다가 데잖아요. 마찬가지로 지혜로운 사람은 악이라든가 거짓말이라든가 그런 나쁜 데 손을 안 댄다, 그게 결국 자기에게 고통이 되니까. 결국은 자기가 자기를 돌아봐서 떳떳하고 가책이 없고 올바르고 그런 것이 가장 인생에서 중요한 것이 아니냐, 그 나머지로 자기에게 오는 행복이나 여러 가지 것들은 다 덤이다, 자기가 그것만 확실하게 지키고 있으면 이건 정말 성공적인 인생을 사는 것이다…. 저는 권력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아요. (고개를 가로저으며) 권력의 무상함이라든가, 권력의 속성이라든가, 이거 저만큼 아는 사람도 없을 거예요. 그래서 그런 거에 제가 집착도 안하고 마음에 평화를 얻었어요. 바르게 산다는 게 제일 가치있는 것이고 나머지는 부수적인 거다, 이런 신념이 확실해졌죠. 그래서 정치도 그렇게 해요.”

-피아노 치는 모습을 본 적이 있는데요.
“(두 손을 올려 연주하듯 손가락을 움직이며) 국민학교(초등학교) 때 피아노를 배우러 다녔어요. 조금 배웠죠 옛날에. 혼자 즐기면서 치다가 최근에는 잘 못쳐요, 시간 별로 없어서.”

-즐겨 치는 곡이 있습니까?
“꽃노래라는 게 있습니다. 또 피아노로 동요 치는 거 좋아해요. 노래도 부르고.”

-어떤 동요인가요.
“너무 오래된 거라서 우리 어린이들은 지금 모를 텐데, ‘둥근 달’이라든가, ‘과꽃’이라든가.”

-강아지를 꾸준히 키우시는 것 같습니다.
“진돗개죠. 봉달이, 봉순이. 어릴 때부터 강아지를 좋아했어요. 그래서 항상 키웠어요. 전에는 스피츠를 키웠었고. 그런데 봉달이, 봉순이가 새끼를 많이 낳아서 전국적으로 분양을 해 지금 전국에서 잘 자라고 있어요. 이름을 우리 태극기를 따서 건ㆍ곤ㆍ감ㆍ이ㆍ청ㆍ홍ㆍ백으로 지어서, 분양받은 분들이 서로 소식도 전달하고.”

-헤어스타일과 옷차림이 전부 관심거리인데요.
“저는 제가 가는 장소, 또 어떤 회합인가, 그게 공적인 건가, 간담회인가, 여러 가지가 있잖아요. 분위기에 어떤 차림이 가장 적합할까를 기준으로 생각합니다.”

-본인이 다 코디하시나요?
“뭐, 거의 그렇죠.”

-헤어스타일을 만져주는 분이 있나요?
“제가 혼자 할 때도 있고 누가 도와주실 때도 있고 그렇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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