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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울 라인을 밟으면 재수가 없다?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10호 16면

지난달 21일(한국시간) 벌어진 보스턴 레드삭스와 뉴욕 양키스의 미국프로야구 경기. 3회초 한 점을 내준 레드삭스의 선발투수 커트 실링(사진)은 이닝이 끝난 뒤 더그아웃을 향해 걸어가며 아쉬운 표정으로 그린 몬스터를 바라보았다. 그린 몬스터는 레드삭스의 홈구장인 펜웨이 파크의 거대한 왼쪽 담장이다.

그린 몬스터에서 눈을 떼고 얼굴을 정면으로 돌린 실링은 갑자기 아래를 내려다보며 무언가를 피하려는 듯 오른발을 크게 내디뎠다. 그의 발 밑에 파울 라인이 있었다. 그는 절대로 파울라인을 밟지 않는 사나이다. 큰 체격(1m98㎝ㆍ107㎏)을 가진 실링이 파울 라인을 밟지 않으려고 껑충 뛰는 모습은 우습게 보일지 모른다. 그러나 실링을 비롯한 많은 투수는 파울 라인을 밟으면 ‘재수가 없다’고 믿는 것 같다.

선수들은 경기 중, 혹은 경기 시작 전 특정한 행동을 반복하거나 삼가면서 심리적인 안정을 찾는다.

한국에서 흔히 ‘징크스’라 불리는 이런 행동들은 사실 경기와 관련된 습관이나 버릇이라고 불러야 한다. 이런 습관ㆍ버릇이 생기는 과정은 다양하다. 예컨대 한 선수가 몇 번 면도를 하지 않고 경기에 나갔는데 그때마다 성적이 좋았다면 그 선수는 면도와 성적을 관련지어 생각할 가능성이 있다.

파울 라인을 슬쩍 넘어가는 실링은 양반이다. 뉴욕 메츠의 올랜도 헤르난데스나 올리버 페레즈 같은 투수들은 허들을 넘듯 파울 라인을 넘는다. 페레즈는 피츠버그 파이어리츠 소속으로 뛰던 신인 선수 시절 이런 행동을 했다가 “애송이 투수가 베테랑 타자들을 잡고 기고만장했다”는 오해를 사기도 했다.

2005년 명예의 전당에 입성한, 통산 3010안타에 빛나는 ‘영원한 3할 타자’ 웨이드 보그스도 자신만의 주술이 있었다. 탬파베이 데블레이스에서 보낸 현역 마지막 시즌인 1999년, 그는 하루 한 끼 이상 닭고기를 먹었고 홈구장에서 열리는 저녁 경기 전에는 꼭 오후 1시47분에 집을 나섰다. 매 타석 껌을 씹었던 보그스는 출루를 하면 껌을 계속 씹고, 아웃을 당하면 바로 뱉어버리기도 했다.

독특한 습관들이 야구 선수들의 전유물은 아니다. 미국프로농구(NBA) 역대 최고 센터 중 한 명인 보스턴 셀틱스의 빌 러셀은 큰 경기를 앞두고 구토를 하곤 했다. 셀틱스가 전성기를 구가하던 1960년대, 셀틱스의 레드 아워백 감독은 62년 플레이오프 경기를 앞두고 “러셀이 구토를 하기 전까지 출전하지 않겠다”고 버티기도 했다. 러셀은 감독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고, 셀틱스는 그해 NBA 우승을 차지했다.

NBA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괴짜인 워싱턴 위저즈의 가드 길버트 아레나스는 매 경기 전 팀 동료 한 명의 유니폼을 라커룸 어딘가에 숨기고 그가 직접 찾아서 입게 한다. 경기가 끝난 다음 아레나스가 유니폼 상의를 벗어 관중석에 던지는 장면은 우리도 중계방송을 통해 흔히 볼 수 있다.

북미아이스하키리그(NHL) 선수들은 소속팀이 플레이오프에 진출하면, 팀이 탈락할 때까지 면도를 안 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4월 중순에 시작하는 플레이오프는 6월 중순까지 이어지는데, 결승전에서 맞붙는 선수들의 얼굴은 판타지 영화에 나올 법한 야수를 연상시킨다.

『스포츠 심리학:개념과 응용』을 쓴 리처드 콕스 미주리 주립대 교수는 최근 “운동 선수들에게 습관(routine)은 매우 중요하다”며 늘 똑같은 행동을 반복함으로써 선수들이 마음의 평온을 찾고 긴장을 풀게 된다고 주장했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은 습관의 동물이라고 했다. 프로 운동선수들이 이를 몸소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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