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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말의 날」과 「종말의식」/서광선(종교인 시평)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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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1992년 10월28일,그러니까 금년 10월에 예수그리스도가 한국에 와 세상의 종말을 고한다고 한다. 예수그리스도가 스스로 그렇게 정한 것이 아니라 「다미선교회」 등 일부 기독교인들이 주장하는 내용이다.
이러한 주장을 믿는 사람들은 그 종말의 날을 준비한다는 것이다. 장사하던 사람들은 장사를 그만두고,사무실에 나가던 사람들은 직장을 그만두고,대학입시를 준비하던 학생들은 모두 다 집어 치우고 밤낮을 가리지 않고 찬송과 기도에 열중하며 「주님 오시는 날」을 위해 준비한다.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세상에 오시는 날 모두 하늘로 들려 올라갈 것이고,준비가 안된 사람들,믿지 않는 사람들은 이제부터 시작되는 7년 동안의 오랜 고통과 고난,재난의 시대를 살아야 한다는 끔찍한 이야기다.
○툭하면 나오는 말세론
「시한부 종말론」이라고 하는 이런 주장들은 대개 틀릴 수 없게 되어 있다. 10월28일에 하늘로 올라가지 못한 사람들은 죄가 많은 사람들이라 이 세상에 남아 있게 되기 때문에 여태껏 살아 온 것처럼 살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어떤 사람들은 스스로 목숨을 끊거나 행방불명이 됨으로써 하늘로 들려 올라갔음을 증명(?)하려 할지 모른다. 10월28일이 돼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겐 사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이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예수와 함께 하늘로 올라가는 것이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 알지도 못할 뿐더러 별 관심도 없기 때문이다.
약 백년전에도 미국의 어떤 기독교인이 날짜를 계산,어느 날 어느 시에 종말이 오고 예수가 다시 온다고 해서 사람들이 높은 산에 올라가 며칠을 기다려도 그런 일이 생기지 않아 모두 실망한 일이 있었다. 계산이 잘못되었다고 몇년을 더 연기했지만 결국 세상은 우리가 사는 그대로 계속되었다. 종말의 계산착오를 한 사람들끼리 모여 교파를 하나 만들고 아직도 종말을 중심으로 한 신앙을 지키고 있다.
○사회적 절망감의 표출
우리는 「종말」이란 말은 많이 사용안해도 「말세」란 말은 많이 한다. 국회의원선거를 한지가 언젠데 아직도 국회가 열리지 못하고 있는가. 말세다. 의사가 멀쩡하게 살 수 있는 아기를 라면종이통에 넣어 죽게 했다니 이것이 말세가 아니고 무엇이냐고 한다. 국방부의 정보사인가 하는 권력기관에서 비밀을 빙자해 우리 보통사람으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금액의 부동산투기가 벌어졌으니 이것 역시 말세가 아니고 무엇이냐고 한다.
종말이나 말세가 언제 어느날 올 것인지 우리는 아무도 모르지만 세상일이 이상하게 돌아가게 되면 어떤 위기감을 가진다. 세상일이 이상하게 돌아 가거나,엄청난 비리가 생기거나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없는 사건이 터질 때마다 위기의식을 갖게 된다.
종말이나 말세를 말하는 것은 위기의식을 말하는 것이다. 보통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가 안될때,보통사람의 힘으로는 도저히 어떻게 할 수 없다고 느낄 때,속수무책 좌절감밖에 없을때 세상이 끝장 날 것이고 끝장나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한 개인이 극도의 좌절감에서 자살을 하듯한 집단이 극도의 무력감에 빠질때 세상의 종말,세상이 끝장나기를 원하게 된다.
그러니까 「종말론」이나 「말세론」이라고 하는 것은 일종의 집단적 자살행위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좌절과 무력감에 깊이 빠지면 빠질수록 말세론은 설득력이 있게 된다. 뒤집어 말하면 결국 말세론은 사회적 절망감이라고 하는 병리현상을 표출시키고 있을 뿐이다.
우리 사회와 기독교 일각에서 일고 있는 「시한부 종말론」을 무지의 소치나 사회적 병리현상으로만 치부해 버릴 수 있을까 반성해 본다. 종말론이나 말세론이 사회적 절망감과 좌절감에서 왔다면 우리는 그 절망감과 좌절감에 대해 생각해야 한다. 그러고는 종말론에 숨어있는 「종말의식」에 민감해야 한다. 종말론에 숨어 있는 위기의식,사회적 위기의식에 민감해야 한다는 얘기다.
○부패세상에 대한 경고
오늘날 우리 대부분의 한국사람들이 절감하는 위기의식은 이런 식으로 돼서는 안되겠다는 것이다. 이렇게 부패한 정치,부패한 사회는 결국 망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종말이나 말세가 온다는 것은 지금 행세하고 있는 기존질서가 망한다는 것이고 망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신새벽 신천지의 개벽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 동학사상이었고,새하늘과 새땅,하늘 나라가 온다는 것이 기독교의 종말사상이다. 사실 모든 종교가 가지고 있는 종말사상은 이 세상이 끝나고 우리 모두가 하늘의 올라가든지,땅에서 고생하든지 하는 이야기가 아니라,부패한 세상에 대한 경고며 새로운 질서와 새 세상에 대한 희망과 기대를 말하는 것이다. 그 경우 종말의식은 새사회 새질서를 만들 수 있는 동력이 된다.
오늘 우리 사회가 필요로 하는 것은 도피적 혹은 자살적인 종말론이 아니라 개혁적 종말의식­절실한 역사적 위기의식에서 분출되는 천지개벽의 희망을 실천이라고 생각된다.<이화여대대학원장·목사>
◇저자약력 ▲61세 ▲미 밴더빌트대학원에서 종교철학박사 ▲이대기독교학과 교수 ▲동문리대학장 ▲예·장 현대교회 담임목사 ▲이대교목실장 ▲동대학원장 ▲주요저서로 『종교와 인간』『벙어리의 노래』『신앞에 민중과 함께』 등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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