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품 시장의 '큰 손' 은행들, 미술품 투기 주범인가, 아트 마케팅 주역인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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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버블 경제가 절정에 달했던 1980년대 말 일본의 대부업자인 모리시타 야스미치(森下泰道)는 세계 미술품 시장의 스타로 떠올랐다. 프랑스 인상파 화가들의 작품을 사들이는 데 한 번에 3000만 달러를 쏟아 부었기 때문이었다. '살모사'라는 별명의 이 비주류 금융가는 유독 인상파 화가의 작품에만 매달렸다. 그가 왜 인상파만 고집하느냐는 질문에 그가 들려준 대답은 지금도 세계 미술계에 회자되고 있다. "인상파 작품들이 현대식 건물의 인테리어와 비교적 잘 어울리기 때문입니다."1980년대 후반 벌어진 사상 유례없는 미술품 투기 실태를 한 마디로 요약해주는 말이다.

이 시기에 미술품 투기가 횡행하게 된 배경에는 두 주역의 역할이 컸다. 야심에 찬 서구의 미술품 경매업체와 거품 경제로 호주머니가 두둑해질 대로 두둑해진 일본 금융계가 바로 그들이다. 소더비와 크리스티 같은 경매업체들은 당시 미술품의 시장 가치를 높이기 위해 수완을 발휘하기 시작하던 참이었다. 일본 금융계에서는 1985년 플라자합의 이후 자산 가치가 급등했다. 1986년 야스다 화재해상은 고흐의 '해바라기'를 4000만 달러에 사들여 세계 미술품 경매가 신기록을 경신했다. 그해 일본인들이 사들인 예술품의 규모는 그 이전보다 4배 가까이 늘어났다.

이듬해 미국 증시가 폭락하면서 일본 금융계의 미술품 수요는 더 커졌다. 투자 대상을 위험한 주식 대신 미술품으로 바꾸려 했기 때문이었다. 이들은 프랑스 인상파 작품을 가장 선호했다. 당시 일본 금융계의 집중적인 투자로 세계 미술시장에서 인상파 작품은 무려 20배 가까이 뛴 것으로 추정된다. 일본의 금융기관들은 자신들이 미술품 수집에 열을 올렸을 뿐만 아니라 미술품을 담보로 시가의 절반까지 대출해주기도 했다. 부동산 회사인 마루코 사는 르누아르.모딜리아니.샤갈을 사들이기 위해 대규모로 증권을 발행했고, 작품을 산 다음 이를 담보로 거액을 대출받았다. 그 돈으로 주식이나 부동산 투기에 앞장서기도 했다. 이런 메커니즘의 핵심에 일본 금융기관의 세계적 미술 작품에 대한 짝사랑이 있었던 셈이다.

최근 국내에서도 금융기관들이 미술품 시장의 큰 손으로 떠오르면서, 1980년대 일본의 금융계처럼 미술품 투기의 주범이 되지 않을까 하는 우려도 커지고 있다. 현재 국민.신한.하나 은행 등 주요 시중 은행들이 앞 다퉈 미술작품을 사들이고 있다. 하나은행은 '하나 컬렉션'이라는 이름으로 주요 작가의 작품을 구입하고 있다. 국민과 신한은행 역시 미술품에 대한 투자 규모를 늘리고 있다(은행들은 구체적인 액수를 밝히지 않고 있다). 이들이 미술품에 주목하는 것은 부동산이 투자 대상으로서 매력을 잃고 주식은 불안하기 때문이다. 유동성이 풍부해진 상황에서 국내외에서 미술품이 새로운 투자 대상으로 급부상하고 있다.

은행이 사들인 작품의 가격도 크게 뛰고 있다. 미술계의 한 인사는 "대형 은행들이 사들인 작품 가격이 크게 오르는 바람에 은행 고객을 잡기 위해 작가와 갤러리가 혈안이 돼 있다"고 밝힌다. 은행들은 직접 투자 말고도 프라이빗뱅킹(PB)팀을 중심으로 고액 자산가들의 미술품 투자를 적극 유도하고 있다. 하지만 미술품은 수익만큼이나 위험성도 큰 투자 대상이라는 점을 간과하고 있다는 지적도 많다. 실제로 1990년대 거품 붕괴로 경영 수지가 악화된 일본 금융기관들은 80년대에 사들인 미술품을 대부분 헐값에 되팔아야 했다.

물론 은행들은 자신들의 미술품 수집이 고객에 대한 아트 마케팅의 일환이라고 주장한다. 생활 수준이 높아진 고객들에게 미술 감상의 기회를 주기 위해 미술품을 사들이고 있다는 얘기다. 그러나 국내의 경우는 아트 마케팅을 위해 미술품을 수집했던 미국 유수 은행들의 궤적과는 사뭇 다르다. 미국 은행들이 미술품을 수집하기 시작한 것은 1920년대부터다. 보스턴 은행은 1924년부터 미국 작가들의 작품을 수집했고, 체이스맨해튼 은행은 1959년부터 세계 각국의 미술품을 사들였다. 이들은 나중에 박물관을 세워 해당 작품들을 일반에 공개하기에 이르렀다. 이들은 자신들이 번 막대한 이익을 사회에 환원하는 방법의 하나로 '코포레이트 아트'(Coporate Art: 기업 차원에서 예술을 장려하고, 수집하고, 전시하는 일)를 선택했다. 미술 작품의 가격이 올라가기만 기다리면서 투자하고, 투자를 장려하는 우리와는 차이가 있다는 얘기다. 미술품 시장의 과열 현상과 함께 그 주역의 하나로 떠오른 우리 금융기관들. 이들이 일본처럼 미술품 투기의 주역이 될지, 아니면 미국처럼 아트 마케팅의 주역이 될지 갈림길에 서 있다.

이여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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