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보사땅 사기가 남긴 교훈(뿌리깊은 사회부조리…이대론 안된다:4)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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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잘못된 관행… 싹트는 부패/이권 있는곳 검은돈 오가기 일쑤/실천가능한 것부터 고쳐나가야
자본주의 체제가 인정하는 가치는 바로 부가가치다. 그리고 그 부가가치를 생산해 내는 주역은 바로 기업이다.
그러나 타락한 자본주의 체제에서 기업이 부가가치를 생산해 내는 과정은 더 복잡해진다. 단순히 인건비나 이자·이윤만이 덧붙여져 부가가치가 생산되는 것이 아니다. 타락한 자본주의 체제에서는 여기에 「부패의 코스트」가 얹혀져야만 비로소 부가가치의 최종액수가 구해진다. 그리고 그 코스트는 결국 소비자들의 부담이나 자원배분의 왜곡 등을 통해 한푼도 남김없이 국민경제의 구석구석에 반영된다. 세상엔 공짜가 없는 것이다.
기업이 치르는 「부패의 코스트」를 가치창출의 원천으로 삼는 집단은 많다. 온갖 이해관계로 기업과 얽히는 모든 집단이 다 여기에 포함된다고 보면 된다. 정치인과 관료가 항상 대표적으로 도마에 오르는 이유는 그들이 기업에 줄 수 있는 반사이익이 그만큼 크고 따라서 기업이 치러야 하는 코스트도 그만큼 비싸기 때문이지,기업의 「비용」을 자신의 「수익」으로 회계처리 하는 집단은 「바늘도둑」이건 「소도둑」이건 다 마찬가지다.
또 기업 스스로가 부패의 코스트를 지려고 하는 경우도 흔하다. 정상적인 비용보다 더 싸게 치인다는 계산이 나올때 「비용절감」의 유혹을 뿌리칠 수 있는 기업인은 그리 흔치 않기 때문이다.
이같은 자본주의의 구조적 속성을 견제하기 위한 제도적 장치는 많다.
기업의 탈세나 개인의 음성소득과 숨바꼭질을 해야 하는 조세제도,결국 소득이 이전하는 과정에서의 「빈틈」을 없애고자 하는 금융실명제,기업이 자신의 「경제력」을 남용하는 것을 막기 위한 공정거래제도 등이 다 자본주의의 타락을 막기 위한 견제장치들이다.
그러나 이러한 제도적 장치를 무색케 하는 것이 바로 이 사회의 「관행」이며 그같은 관행 또한 하나하나 뜯어보면 다 나름대로 생기게 된 까닭이 반드시 있게 마련이다.
사실 이번의 정보사땅 사기사건과 지난해 2월의 수서사건,올들어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현대상선의 탈세사건들은 다 별개의 사건들이지만 이들 별개의 사건들을 관통하는 한가지 공통점이 있다. 바로 이들 사건들이 하나같이 평소 우리 사회의 「거래관행」에 그 출발점을 두고 있다는 것이다.
지역구민들과 국회의원의 민원해결 「관행」,기업인과 정치인의 정치자금 마련 「관행」,금융기관과 고객의 금융거래 「관행」,정상적으로는 안되는 일을 고위직 인사가 풀어주는 정치적 해결 「관행」,기업이 바이어에게 건네주는 리베이트 「관행」,관료조직의 판공비를 기업이 대는 「관행」,명절이면 인정이 오가는 떡값 「관행」등 우리가 별개의 사건들에서 찾을 수 있는 우리 주변의 관행은 얼마든지 열거할 수가 있다.
따지고 보면 사건이 터질 때마다 「범인」으로 지목된 사람들이 「죄의식」을 별로 느끼지 않는 것은 그들이 뻔뻔스러워서라기 보다 평소의 그같은 관행에 대한 「공범의식」이 더 강하기 때문이라고 볼 수도 있고 또 사건이 터질 때마다 제도개선이 줄을 잇지만 사건의 재발을 막을 수 없는 것도 그같은 부조리가 「관행」에서부터 자연발생적으로 생겨나는 것이지 제도가 잘못되어 생겨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금융실명제와 같은 제도가 바로 그같은 관행이 발을 붙일 틈을 주지말자는 것인데 역으로 금융실명제를 가로막고 있는 것이 바로 그와 같은 관행인 것이다.
금융실명제부터 실시해야 그같은 관행이 없어지느냐,아니면 관행부터 하나하나 고쳐야 금융실명제가 자리잡느냐는 「실명제 논쟁」은 사실 이번과 같은 대형사건이 터질때마다 재론되는 「부조리 척결」의 방법론과 그 구조가 똑같은 것이다.
예컨대 정치자금의 양성화가 이루어져야 정치권의 이권개입이 없어지리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지만 동시에 정치자금의 양성화를 가로막는 단 하나의 걸림돌이 바로 현재 정치자금이 조달되는 「관행」이라는 것을 모르는 국민 또한 나라안에 한명도 없을 것이다.
이런 문제에 비하면 예를 들어 공무원의 봉급을 현실화 한다든가,이권의 소지가 되는 정부의 각종 규제를 푼다든가 하는 것은 비교적 손쉽게 고쳐갈 수 있는 제도적 개선책이다.
공무원 봉급의 현실화는 『공무원 봉급이 10% 올랐으니 쌀값도,내 봉급도 똑같이 10% 올려야겠다』라는 해괴한(?) 논리에서 우리 모두가 해방되기만 하면 풀릴 수 있는 문제다. 또 「정부규제」의 이면인 「공무원의 밥그릇」만 해결하고 정권차원의 의지만 있으면 정부규제의 완화도 비록 시간이 걸리겠지만 이루어낼 수 있는 과제다.
부조리를 개탄하면서 제도만 원망할 수도 없고 사람만 탓할 일도 아니다.
진보세력이든 보수세력이든 혁명적인 해결방법을 원하지 않는다면 우리 주변의 실현가능한 일부터 하나하나 실행하면서 스스로의 몸에 배인 「관행」부터 고쳐가는 것 밖에는 달리 뾰족한 수가 있을까.<김수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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