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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분계선이 사라졌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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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남북 분단으로 끊어졌던 경의선이 56년 만에, 동해선 열차가 57년 만에 다시 이어졌다. 17일 시범운행에 나선 동해선 북한 열차가 금강산역을 출발해 군사분계선을 넘어 강원도 제진역을 향해 달리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지금 막 열차가 군사분계선(MDL)을 넘고 있습니다."

17일 낮 12시18분. 문산역을 출발한 경의선 열차에 안내육성이 울려퍼졌다. 철마(鐵馬)가 비무장지대(DMZ)를 관통해 북한 땅에 들어선 순간이었다. 그 순간만은 한반도의 허리를 동강 낸 군사분계선이 사라진 듯했다.

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6월 12일. 남쪽 땅이었던 개성이 북한군에 점령되면서 열차 운행도 멎었다. 그 뒤 56년간 이곳에선 시간이 멈췄다. 멈춰 선 경의선 열차는 분단과 상쟁의 생채기를 안고 녹슬어 갔다.

차창 밖으로 보이는 DMZ의 처녀림은 남측 손님 100명을 어루만지듯 철로 안쪽까지 뻗어 5월의 신록을 뿜어냈다. 열차 없는 철길에 익숙해졌을 산새와 고라니들은 깜짝 놀라 달음질쳤다.

잠시 후 개성벌이 드러나며 초대형 인공기가 걸린 북한 기정리 선전마을이 눈에 들어왔다.

우리에겐 대립과 증오, 공포와 분열의 상징인 남홍색의 인공기 뒤편으로는 인접한 남측 대성동 자유마을의 국기 게양대가 들어왔다. 서로 깃대 높이와 국기의 크기로 위세를 과시하던 냉전시대의 유물이었다. 그들의 펄럭임은 이제 고단한 임무를 마치고 안식을 갖고 싶다는 아우성 같았다.

열차가 판문역에 접어들자 인접한 개성공단의 남측 근로자 수백 명이 플래카드를 내걸고 열차의 북행길을 축하했다. 수백m 간격으로 늘어선 북한군 병사들의 날카로운 감시 눈초리만이 아직 남북이 온전한 화해 협력을 맞이하지 못했음을 일깨워 주었다.

북녘의 분위기는 기자의 예상을 빗나갔다. 축포와 환호성, 열차길에 늘어선 사람들의 기대와 희망이 가득했던 남쪽과는 확연히 달랐다.

북한 최남단인 판문역에는 역무원 7명과 13명의 세관원만이 나왔다. 모내기를 준비하는 논에는 어디론가 사라진 농민들이 두고 간 농기구가 나뒹굴고 있었다.

열차에 동승한 북한 측 인사 50명도 썰렁한 분위기였다. 방북취재 때 만나 기자와 친분이 있는 북측 단장 권호웅 내각 책임참사는 내내 굳은 표정이었다. 북측이 남측과 같은 100명을 탑승시키려다 규모를 절반으로 줄인 것도 눈길을 끄는 대목이다.

이런저런 생각에 빠져들 때쯤 갑자기 "통일! 통일!"을 연호하는 소리가 들렸다. 개성역 도착을 환영하는 북한 학생들이었다. 흰색 셔츠에 붉은 넥타이를 맨 그들은 동원된 표정이 역력했다. 꽃다발 증정 같은 환영 분위기는 없었다.

이런 이상한 상황에 대해 열차에 탄 한 남측의 고위 관계자는 "북한 군부는 시험운행을 쌀 40만t과 비누.신발 등 원자재를 챙기는 행사 정도로만 인식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경의선 7435열차=이영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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